대학생 A씨는 ‘모태솔로’입니다. 남중·남고 출신 공대생의 숙명일까요? 연애를 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사라져가던 어느 날,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동아리에서 이상형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연애 초보인 A씨는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조바심은 나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으니 말이죠. 그렇다고 학교 친구들에게 털어놓는 건 왠지 부끄럽고요. 끙끙 앓던 A씨는 문득 페이스북에서 본 ‘대나무 숲’이 생각났습니다. ‘아, 맞다! 거기에 고민을 올려보자!’ 그는 곧바로 대나무 숲에 접속했습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글을 썼습니다. “안녕하세요. 요즘 동아리 활동을 하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여성을 만났는데요….”
“저기요, 제 고민 좀 들어주세요.”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특별한 페이지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대나무 숲이라는 이름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요. 이곳은 신분을 밝히는 기존 SNS와는 조금 다른 공간입니다. 익명으로 운영된다는 점이 특징이죠. 누가 올린 글인지 전혀 알 수 없어서인지 이용자들은 속 깊은 이야기를 술술 꺼내놓습니다.
대나무 숲은 2012년 9월 트위터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익명의 출판사 직원이 회사 부조리를 고발하려고 ‘출판사 옆 대나무 숲’이라는 계정을 개설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개해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게 주효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이슈가 됐고 곧바로 직종별 대나무 숲이 생겨났습니다. 디자인 회사나 IT 회사, 방송사 등등 말이죠.
대나무 숲 열풍은 지난해 말 페이스북으로 옮겨왔습니다. 트위터에서는 직장인이 주로 활동했다면 페이스북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재편됐습니다. 몇몇 중·고교에서도 운영하지만 아직은 대학교 계정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페이스북 대나무 숲이 트위터와 다른 점은 또 있습니다. 이용자들이 트위터에서처럼 직접 고민을 올리는 게 아니라 운영자에게 익명의 메시지로 보내는 방식이에요. 필터링을 거친 글만이 페이스북에 오르는 겁니다. 무분별하거나 장난 섞인 글이 사라지니 진짜 고민을 털어놓는 공간으로 발전했죠.
서울대에서 처음 개설된 페이스북 대나무 숲 페이지 수는 7개월여 만에 40여개로 늘었습니다. 이름은 학교명에 대나무 숲만 붙였습니다. 얼추 더해 보니 이들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9만명에 육박합니다. 연세대나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등 활동량이 많은 페이지는 하루에도 여러 개의 고민 글과 댓글이 올라옵니다.
“괜찮아요, 무엇이든 말해 보세요.”
대나무 숲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유래를 알면 무릎을 탁 칠 겁니다. 대나무 숲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귀 설화에서 나왔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로 많이 알려졌지요. 왕의 관모(冠帽)를 만들던 기술자가 “왕의 귀는 당나귀처럼 크다”는 비밀을 평생 간직하다 죽기 전 대나무 숲에 들어가 외쳤다는 이야기 말이죠.
현대판 대나무 숲은 ‘힐링’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말 못할 고충을 털어놓고 위로받는 공간이 된 것이죠. 어떤 고민이라도 좋습니다. 글쓴이 신분이 드러날 걱정도 없고요. 게다가 다른 이들에게 조언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요.
올라오는 내용은 사랑이나 연애와 관련된 것이 많네요. 학교에서 우연히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하고 “학생식당에서 박보영 닮은 여자를 봤어요. 163∼165㎝ 정도? 누군지 정말 궁금합니다”라는 글도 눈에 띕니다. 근데 최근엔 가벼운 애정 얘기는 삼가자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습니다.
같은 대학 구성원끼리 모이다 보니 학교생활 관련 의견도 올라옵니다.
“조별과제 좀 똑바로 합시다. 메시지 답장도 안 하는 새내기들, 오늘 안에 자료 안 보내면 조원평가 0점 준다.” “학우 여러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깨끗이 봅시다! 제가 빌린 책 보니 57쪽에 누가 파리를 잡아놨네요.” 글을 보면서 분명 ‘뜨끔’ 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앞에 세워놓고 하기 힘든 말도 대나무 숲 안에선 어렵지 않습니다. 거침없는 직언은 웃음과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진지한 내용도 꽤 됩니다. 취직이나 등록금 문제 말이죠.
“방학이 6주 남은 상황에 뭘 할 수 있을까요. 다들 스터디에, 취업준비에 정신이 없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제게 화가 납니다.”
“아빠 다니는 회사가 문 닫을지 모른대요. 동생도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는데 등록금을 감당 못할 수도 있다네요. 장학금은 물론이고, 2학기부턴 과외 아르바이트도 시작해야겠어요.” 이런 글에 다른 학우들은 응원 댓글을 달기도 합니다. “집안 사정을 헤아리고 보탬이 되려는 모습, 멋지네요.”
“왜 대나무 숲을 찾으셨나요?”
우리 젊은이들이 인터넷 속 대나무 숲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이 올 초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학생 951명에 물으니 응답자 66.7%(634명)가 스스로를 ‘나홀로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홀로족은 혼자 있기를 즐기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이들은 밥을 먹거나 수업을 듣는 등의 학교생활 대부분을 혼자 하는데요.
주목할 점은 이들 중 88.5%가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편이 낫겠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같이 울고 웃으며 공감해줄 사람이 필요할 때’(26.2%) 가장 그렇게 느낀답니다. 혼자가 편하지만 가끔은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 말동무가 필요하다는 거죠. 요즘 젊은 세대들, 사실은 외로웠던 게 아닐까요.
전문가들도 동의합니다. 아주대 심리학과 김혜숙 교수는 “학생들은 연애나 취업, 성적 등의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온라인상에서 모르는 사람과의 교류가 익숙해진 요즘 학생들이 속마음을 얘기할 새로운 곳을 찾는 것 같다”고 진단했습니다.
실제로 대나무 숲에는 외로움을 토로하는 글이 많이 보입니다. 한 학생은 “방학 때 다들 친구 만나 놀기 바쁘던데 전 이상하게 기회가 안 나네요. 인간관계 관리가 이렇게 엉망이었나 한탄하게 됩니다”라고 적었더군요. 이 글엔 20명 정도가 ‘좋아요’를 누르고 공감을 표했습니다. 댓글에도 비슷한 고민과 위로의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다른 페이지의 어떤 학생도 “잠시만이라도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겠느냐”며 글을 올렸는데요. 여기엔 해당 계정 운영자가 직접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게 바로 ‘대숲’이 좋아하는 것”이라고요.
지금 당신의 마음속엔 어떤 얘기가 담겨있나요. 혼자 끙끙대면 병 됩니다. 같이 외쳐볼까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슬로 뉴스] 외로운 청춘들, 대숲서 비밀을 외치다
입력 2014-07-24 0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