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남선 (4) 공산주의 붕괴 러시아인들의 영적 갈급을 보다

입력 2014-07-24 02:16
1997년 가을 서울 국제선교회 사무실에서 필자(왼쪽)가 선교 관련 일을 하고 있다.

1992년 초 어느 전도사의 소개로 여의도순복음교회 통역에 지원했다가 ‘순복음가족’ 신문 기자로 뽑혔다.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하는 기자가 되면서 얼마나 감사하고 벅찬 날들을 보냈는지 모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 교수님들을 뵙고 인터뷰하고 뜨거운 기도에 불붙은 성도들을 바라보며 신앙의 위력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92년 4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금식기도 대성회를 개최했을 때 설교자로 만난 멀린 캐로더스 교수는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한 취재원이었다. 그는 ‘Prison to praise’(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금식기도 대성회를 취재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했다. 그때 어떤 여성이 손수건을 줬는데 알고 보니 캐로더스 교수의 부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캐로더스 교수와 인터뷰를 하게 됐고 그분이 미국으로 돌아가신 뒤 자신의 책들을 내게 보내주기도 했다.

선교학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나 ‘번영신학’의 원조격인 로버트 슐러 목사도 지금은 누렇게 변한 내 취재수첩에서 기억할 수 있는 저명인사들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그레고리 애덤스는 당시 인터뷰를 계기로 내 선교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아직까지 관계를 잇고 있는 소중한 신앙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했다.

그해 6월 나는 조용기 목사님을 비롯한 선교 일행과 모스크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부흥집회 취재차 동행했다. 당시 소련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해체된 시점이라 국민들은 영적 진공상태에 빠져 복음에 갈급해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크렘린궁 안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 손잡고 선교 일행 앞에서 울면서 외치는 통성기도는 불신자들에게 성령의 불을 내린 하나님의 역사 현장이었다. 이러한 열기에 놀란 나머지 소련 당국은 집회 3일째 되던 날 집회를 열지 못하게 막았다.

선교 팀들은 집회가 철회되자 급히 모여 의논한 뒤 크렘린궁 바깥에서 옥외집회를 열기로 했다. 우리의 찬양과 기도소리에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하나님은 신앙에 갈급하는 많은 허기진 영혼들을 불러 모아 주셨다.

옥외집회가 진행되던 중 어떤 여성이 나에게 다가와 “어제 내 딸의 사진을 찍었던데 한 장 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녀는 여섯 살짜리 딸이 심장병으로 5∼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며 자기 딸의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기도했다. 어머니가 감동받았는지 자신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날의 경험은 내가 선교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수많은 이들을 죄와 병에서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을 터지게 했다. 그래서인지 성령께서 M.I.(Mission International·국제선교회)를 시작하라는 말씀이 어렴풋이 내 귀에 들린 듯했다.

한국에 돌아와 오산리기도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청했다. “때가 급하니, 바로 시작하라”는 답이 왔다. 순복음교회 측과 상의해 선교에 뜻이 있다고 말씀드린 뒤 아쉽지만 기자직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해 10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성봉회관에서 ‘M.I. 서울’ 사역을 시작했다. M.I. 서울센터에서 영국과 미국의 전문 선교사들을 모시고 선교 세미나를 열었으며 94년에는 영국 피켄햄 선교훈련센터에 3개월마다 단기선교팀을 파송하는 등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하나님 나라 확장과 예수님의 제자 세우기에 혼신의 힘을 바친 기쁨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정리=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