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남선 (3) “주님 일꾼 되자” 신학공부 위해 교직 접고 서울로

입력 2014-07-23 03:33
1990년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졸업식을 마친 뒤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고3 때 주님을 영접한 뒤 1981년 경북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3학년 때 KABS(캡스·Korean American Bible Study·한미성서연구회)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영어 성경공부에 심취했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알게 된 미국인 선교사님으로부터 영어성경을 배웠고 주일에 대구 YWCA에서 영어예배를 드리곤 했다. 캡스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때는 아무 부담 없이 그야말로 주님의 말씀에 푹 빠진 시기여서 대학기간 가장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85년 경북 안동의 영문고교에 교사직을 지원했다. 내가 사범대 출신이 아니어서 직접 학교를 찾아가 지원한 뒤 시험을 쳤다. 내가 그 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은 우연 반 필연 반이었다. 졸업 후 교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친구와 함께 영문고교 앞을 지나가는데 ‘멍에를 메고 배우자’라는 교훈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이 교훈이 불신자에서 신앙인이 된 내 삶을 설명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내 신앙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을 것 같아 “이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경북대를 수석 졸업한 내 친구를 비롯해 이화여대 등 유명대 출신들이 이 학교 교사로 지원해 긴장했다. 더구나 나는 당시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 영문고교는 세례를 받은 사람을 주로 뽑았다. 다소 암담했다.

면접 때 학교 이사장 앞에서 종교관 인생관 교육관을 발표했다. 나는 솔직하게 “우리 가정이 불교 집안이지만 나는 주님을 개인적으로 믿는데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개인적 구주로 영접한다”고 말했다. 영어성경 해석 시험과 5분 티칭(teaching) 실습은 캡스 동아리에서 성경공부와 후배 지도 경험 덕분으로 쉽게 넘어갔다. 학교에서 내 실력과 솔직함을 높이 샀는지 나는 영어교사직에 합격했다.

하지만 영문고교에서의 교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경북대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학교 측에서 대학원과 교사 중 택일할 것을 요구했다. 공부 욕심이 있던 나는 대학원을 포기하지 못하고 대학원 근처의 한 공업고로 옮겼다. 공고에서는 오후 3시 이후 시간이 남아 대학원 수업과 병행할 수 있었다.

공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상담실에서 근무했다. 이때 소위 문제아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이들을 위해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방과 후에 이들을 모아 영어성경을 가르쳤다. 한 학생이 우연히 미국인하고 펜팔을 하다가 내용이 어렵다며 편지를 내게 갖고 왔는데 상대방이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기독교 교육학·상담학 교수였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기독교 교육학이나 상담학을 공부하면 소외된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의 신학 입문은 이처럼 우연히 다가왔다.

알아보니 미국 교수님들이 1년에 두 차례 한 달씩 서울 경희대에서 강의를 했다. 또 테이프 등을 통해 통신강좌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편을 잡으면서 동시에 통신강좌로 공부했다. 신학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결국 90년 교직에서 물러난 뒤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분교가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 있었다. 과제물을 들고 교수님을 찾아가 개인적으로 교정을 받는 등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교수님들이 나의 노력을 가상히 봤는지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조교에 임명했다.

낮에는 캡스 간사로, 신학대학원 조교로 활동하면서 저녁에는 영어학원 강사 일을 했다. 연세대 이대 서강대 홍익대 등 신촌 중심의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영어성경을 가르치던 열정은 나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그때 동행하며 만났던 선후배들은 지금 대부분 목회자가 돼 주님을 섬기고 있다.

정리=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