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까지 왕이나 소수 귀족만 누릴 수 있던 귀한 재료. 1960년대 들어서야 길가나 가게에서 신문처럼 살 수 있게 됐고 80년대 초반까지 여름마다 대목을 맞았던 상품. 바로 얼음이다.
냉장고 있는 집이 드물고 얼음 정수기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 사람들은 여름이 오면 너나할 것 없이 '얼음집'을 찾아 더위를 식힐 귀한 재료를 사갔다. 81년까지 서울에만 얼음 제조업체 23곳에서 하루 5000각의 얼음을 생산했다.
그러나 이제 서울에 제조업체는 대부분 사라지고 얼음집(소매상)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대형마트에 밀려 얼음집의 '큰손'이던 재래시장이 활력을 잃고 집집마다 보급된 냉장고와 얼음 정수기에 가정에서도 설 자리를 잃었다. 그래도 아직 명맥을 잇고 있는 몇몇 얼음집은 대목인 여름철에도 석유 판매와 대리기사 등 부업을 해가며 얼음을 팔고 있다.
"얼음 하나만 배달해줘요. 우리 생선집, 서울병무청 앞. 급하니까 하나 빨리." 지난 11일 오후 서울 상도동의 소매상 'S얼음'.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가게 입구에서 재촉하자 주인 박모(52)씨는 "알았다"며 냉장고에서 5㎏짜리 아이스박스용 얼음 하나를 꺼냈다. 포대를 벗긴 얼음을 반으로 쪼개 파란 비닐에 넣은 뒤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박씨는 20년 전 이곳에 얼음집을 열었다. 당시엔 장사 재미가 좋았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97년엔 얼음이 부족해 '얼음파동'까지 일어났다. 외환위기도 무서운 줄 몰랐다. 그는 "오전에 얼음을 다 팔고 일찌감치 가게 문을 닫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인근에 우후죽순 얼음집이 들어섰지만 지금은 박씨 가게 하나만 남았다. 8월 초 전후로 40개씩 팔리던 5㎏짜리 아이스박스용 얼음은 이제 많아야 하루 10개밖에 안 팔린다. 한창 때 개당 2만원을 훌쩍 넘겼지만 지금은 한여름에도 7000원밖에 안 된다.
재래시장이나 식당가에 모여 있던 얼음집들은 상권이 쇠락하며 함께 무너졌다. 대형마트는 각자 얼음을 조달하기에 얼음집 운영엔 도움이 안 됐다. 자연스레 문 닫는 가게가 늘었고 얼음공장도 경영난에 처했다. 2000년대 들어 대거 보급된 식당용 대형 냉장고와 정수기는 결정타를 날렸다.
얼음만 팔아선 살아남을 수 없게 되자 얼음집 상인들은 '투잡' '스리잡'에 나섰다. S얼음 구석의 냉장고 앞엔 '등유 1500원', 유리창에는 '얼음·석유'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겨울에는 석유, 여름에는 얼음을 판다. 이도 모자라 박씨는 대리운전 일도 하고 있다.
40년 역사의 얼음제조업체 J사는 고급 얼음을 특화 상품으로 내놨다. 광고에 쓰는 투명한 얼음, 호텔 칵테일바에 납품하는 반짝이는 얼음 등에 집중해 고급시장에서 승부를 보려 한다.
전수민 윤성민 임지훈 기자 suminism@kmib.co.kr
[단독] 여름 대목 실종 시대 얼음가게의 사투
입력 2014-07-22 0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