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에 인도가 창설을 제안했지만 본부는 중국에 생긴다.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가 설립하기로 한 '신(新)개발은행(NDB)' 얘기다. 상하이 국제문제연구원 세계경제연구소의 장하이빙(張海氷) 소장은 "NDB는 중국에 경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 큰 이득이 된다"며 "중국이 '책임감 있는 대국'임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NDB는 어디까지나 중국이 주도하는, 중국을 위한 기구라는 뜻이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지난 15일 브라질 포르탈레자에서 제6차 브릭스 정상회의를 열고 NDB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의 글로벌 금융 패권에 반기(反旗) 들다= 2016년부터 본격 가동되는 NDB는 5개국이 100억 달러(10조3000억원)씩 균등 출자해 500억 달러의 초기자본금으로 출발한다. 자본금은 5년 내 1000억 달러로 확대된다. 다른 신흥국들의 가입은 허용하지만 브릭스 5개국의 출자 비중은 55% 이상으로 유지할 방침이다.
NDB는 신흥국의 국제통화기금(IMF), 신흥국판 세계은행으로 보면 된다. 세계은행과 IMF처럼 브릭스를 비롯한 신흥국에 자금을 융자하거나 구제금융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NDB는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미국·유럽의 주도권이 바뀌지 않는 현실에 브릭스가 불만을 품고 함께 만들기로 한 것이다. 브릭스는 수년 전부터 IMF 내에서 투표권 확대를 요구해 왔지만, 가장 영향력이 센 미국이 움직이지 않아 번번이 좌절됐다. 일례로 중국은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이지만 현재 IMF 이사회 내에서 투표권 비중은 3.81%로 벨기에(4.97%)나 네덜란드(4.65%)만도 못하다.
브릭스란 용어를 2001년 처음 만들어낸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은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금융 패권이 세계 경제의 실제적인 변화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NDB에 대해 “서구인들이 IMF에 브릭스가 돈만 더 낼 것을 바라고 그에 부합하는 지위를 줄 생각을 안 하니 브릭스 사람들이 ‘우리 것을 스스로 만들자’고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브릭스 경제는 최근 2년 동안 성장세가 다소 둔화됐지만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커지고 있다. 전 세계 영토의 26%, 인구의 46%를 차지하는 브릭스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1.1%, 수출의 18.6%를 점하고 있다. GDP 규모(지난해 기준)로 중국이 세계 2위, 브라질 7위, 러시아 8위, 인도 10위, 남아공이 34위다.
◇실질적 대안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NDB가 단박에 IMF와 세계은행의 대항마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일단 규모가 기존 국제금융기구들에 비해 작기 때문이다. NDB는 자본금이 500억 달러지만 세계은행은 2232억 달러에 달한다. 미주개발은행(IDB)과 아시아개발은행(ADB)도 각각 1710억 달러, 780억 달러로 NDB보다 크다.
개발도상국들의 자금 수요는 연간 1조 달러에 달하는데 NDB는 34억 달러 정도만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NDB가 세계은행과 IMF의 역할을 대체한다기보다는 일부를 보조하는 데 그칠 것이란 의미다.
이에 국제금융센터는 NDB가 신흥국의 자금지원 채널 확대라는 실질적 효과보다는 정치적·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고 평가했다. 국제금융센터 박미정 연구원은 “자체 개발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미국 등 선진국에 대한 정치적 레버리지 효과를 나타낼 수 있고, 기존 국제금융체제에서 노출된 한계를 보완하는 기능과 신흥국 간 협력 강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 컨설팅업체 옥스퍼드 어낼리티카는 “신흥국의 필요에 중점을 둔 새로운 금융상품 개발과 신흥국 통화 거래가 확대될 전망”이라며 “전 세계 투자규모와 인프라 투자 확대 추이를 감안할 때 NDB는 상당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의 헤게모니를 중국으로 옮기는 NDB, 잘 굴러갈까=2012년 인도가 개발은행 설립을 처음 제안한 뒤 합의까지 2년이나 걸린 것은 브릭스 국가들 사이에 의견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경제규모에 걸맞은 최대 지분을 요구했지만 인도와 브라질은 균등한 지분을 고수했다. 결국 중국이 양보해 초기자본금을 고르게 출자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NDB 본부를 뉴델리에 유치하려 했던 인도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본부는 중국 상하이로 낙점됐다. IMF와 세계은행 본부가 모두 워싱턴DC에 위치해 미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처럼 NDB도 본부 위치부터 중국의 파워를 드러내게 됐다. 중국의 경제규모는 인도의 4배, 남아공의 28배로 나머지 브릭스 4개국을 합한 것보다도 크다.
인도는 본부를 놓친 대신 초대 총재직을 확보한 것을 위안거리로 삼고 있지만 5년 임기의 총재는 5개국이 돌아가며 맡는다. 남아공에는 아프리카 지역본부가 설치되며 이사회 의장은 브라질, 운영위원회 의장은 러시아에서 맡기로 했다.
브릭스는 NDB 설립과 함께 1000억 달러 규모의 위기대응기금(CRA)도 조성하기로 했다. 이는 금융위기와 같은 유사시를 대비한 지원기금으로 중국이 410억 달러, 남아공 50억 달러, 나머지 국가들이 180억 달러씩 내기로 했다. 중국은 최대 출자국이지만 인출 한도는 출자금의 절반(205억 달러)으로 정했고, 남아공은 출자금의 배(100억 달러)를 받도록 했다. 나머지 국가들은 출자한 만큼 인출할 수 있다. 기금 액수와 운영 면에서도 중국의 비중과 여유가 두드러진다.
AP통신은 미국의 금융 헤게모니(패권)를 또 다른 슈퍼파워인 중국으로 옮기는 것에 나머지 브릭스 4개국이 흔쾌히 동의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이 NDB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중국이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계속 주도권을 키우려 할 텐데, 회원국 사이에 공조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것이다.
각국의 정치적 입장 차이와 자국 내 이슈도 협력과 공조를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국제금융협회(IIF)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 브라질은 대선, 인도는 새로운 성장정책 추진 등 저마다 중대한 이슈가 산적해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 성과가 회원국 간 결속력 제고로 이어지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도 “인도와 남아공은 NDB가 자국의 인프라 건설에 자금을 조달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반면, 중국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촉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나머지 4개국이 중국을 잘 견제해서 NDB를 운영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인도 자와할랄 네루대의 비슈와지트 다르 교수는 “중국이 지배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개발은행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며 “NDB를 중국의 헤게모니 강화 도구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브릭스와 마찬가지로 신흥국인 우리나라로서는 NDB 출범 등 브릭스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일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NDB 설립은 브릭스가 정책수용자에서 벗어나 국제금융질서의 주요 주체로 변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향후 변화하는 국제금융질서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
[월드 이슈] 美 글로벌 금융패권 맞서 신흥경제 5국 뭉쳤다
입력 2014-07-22 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