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과 친척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왔다. 우리 집 맞은편에 교회가 있었음에도 집안 분위기상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연히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랐다.
불도의 기운 속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의식한 것은 우리 집에 세 들어 사시는 전도사 가정 때문이었다. 전도사는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사모님은 알뜰하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전도사 부부가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문을 여는 소리에 종종 깼다. 어릴 적 일임에도 “저분들은 이른 새벽 교회에 가서 무엇을 하시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은 기억이 또렷하다. 전도사 부부 덕분에 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갖게 됐다. 이는 지금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하는 새벽기도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때 그 전도사님이 바로 한국교회연합 전 대표회장이신 박위근 서울 염천교회 원로목사님이시다. 한국교회에서 큰일을 많이 하시고 훌륭한 사역을 해오신 박 목사님이 나와 기독교의 첫 연결고리였다는 점은 내 삶에 엄청난 행운이 아닌가 싶다. 몇 년 전 인도 나갈랜드에서 사역한 뒤 여름에 잠시 귀국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박 목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당시 아련했던 추억을 회상하고 기독교 인연을 처음 만들어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전도사와의 만남이 내 신앙을 본격적으로 키우지는 못했다. 교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그분 덕에 처음 싹튼 것은 맞지만 여전히 집안을 휘감고 있던 불교 기운을 어린 내가 쉽게 꺾기는 어려웠다. 교회를 가고 싶다는 막연한 갈망은 어느새 교회를 가면 부모님이 엄청 화낼 거라는 두려움에 의해 사그라지곤 했다. 신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은 고교시절 때였다. 추첨을 통해 입학하게 된 곳이 대구 정화여고로 당시에는 미션스쿨이었다. 지금도 미션스쿨에 가게 된 것이 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고2 때인 1979년 여름 채플시간으로 기억한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학교를 방문해 운동장에서 말씀을 전했다. 당시 나는 사춘기여서 “왜 사람은 죽고 헤어질까” 등 ‘영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선교사가 설교 마지막에 “우리가 지금 만나서 헤어지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히 만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선교사가 그 말을 마친 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했다. 내 마음에 감동이 와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때 성령의 불이 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에 감전된 듯하면서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게 내게는 주님이 주신 첫 성령의 흔적이 됐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듬해에도 이어진다. 고3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나는 한동안 배가 아프다가 그해 여름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통증이 심해져 병원에 찾아갔다가 난소 종양 판정을 받았다. 결국 종양을 떼 내는 수술을 하기로 했는데 대수술을 앞두고 너무 무서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이동영 의사 선생님이 내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잘 모르지만 믿고 싶다”고 말하자 이 선생님은 수술에 앞서 기도를 해줬다. “사랑의 하나님, 당신의 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죽음에서 건지시며 새 삶을 허락해 주옵소서. 당신 딸이 당신을 알기 원합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딸이 되게 해 주옵소서.”
6시간 진행된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병실에 혼자 있던 나는 우연히 CBS 채널에서 공감을 주는 목사님들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말씀 속에 주님이 나를 찾아 위로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주님, 절망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을 알려줄 수 있는 영혼의 치료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외쳤다. 내가 가야 할 신앙의 길은 그날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리=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
[역경의 열매] 박남선 (2) 高 3때 난소 종양 판정 “주님, 새 삶을 주소서”
입력 2014-07-22 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