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처음 만난 건 1995년 어느 봄날이었다. 처녀 총각이던 두 사람은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 2층 커피숍에서 지인 소개로 처음 만났다. 일종의 소개팅 자리였다.
여자는 남자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키가 작았고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호감이 생겼다. 남자는 달변이었고 유머러스했다. 그는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한 뒤 아이들을 상대로 한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자는 금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이듬해 3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남자는 어느 날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남자는 협성대 신대원에 진학했고 2001년 경기도 파주에 ‘기뻐하는교회’를 개척했다. 개척교회 대부분이 그러하듯 교회는 미자립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부부는 누구보다 행복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불행한 사고가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남자는 교회 차량을 수리하러 카센터에 들렀다 변을 당했다. 그는 리프트 난간을 밟고 차에 들어갔다 나오는 과정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 겨우 1m 높이였지만 남자는 머리를 땅에 부딪쳤고 뇌병변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한수(50) 목사와 남혜경(46) 사모다. 최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남 사모는 “목사님이 의식은 있는데 몸은 가눌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목사님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영양분은 코에 연결된 호스로 섭취하고 일어나거나 앉는 건 불가능해요. 손가락 정도만 움직일 수 있어요. 의사 표현은 눈으로만 하고요.”
김 목사는 아이들 사랑이 지극했던 인물이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는 교회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상대로 손가락 인형극을 선보였다. 아이들은 김 목사를 ‘미키 아저씨’라고 불렀다. 하지만 김 목사의 손가락엔 지금 인형이 아닌 맥박 등을 체크하는 장치가 붙어 있다.
더 큰 문제는 아직까지도 큰 수술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뇌압이나 염증 때문에 두개골을 여는 수술을 3차례나 받았다. 현재 그는 뇌압 때문에 오른쪽 두개골을 뺀 상태여서 머리 한쪽이 푹 꺼져 있다. 김 목사는 오는 28일 인공뼈를 오른쪽 머리에 넣는 수술을 받는다.
김 목사가 투병을 하면서 교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예배를 기다리는 성도들 때문에 남 사모가 약식으로 주일예배만 진행한다. 남 사모는 시숙이 방문하는 토요일을 제외하면 일주일 내내 병원에 머문다. 병원비는 2년 전 가입한 실손 보험으로 해결하고 있다. 고 2학년인 딸, 중 2학년인 아들은 각각 학교 기숙사와 파주 이모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남 사모는 “나도 이렇게 힘든데 목사님은 오죽하실까 싶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원망한 적은 없어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겠죠. 하지만 이런 생각은 종종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언제 올까, 왜 이렇게 응답의 시간이 길어질까….”
남 사모의 표정은 비교적 밝았다.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인터뷰 말미에 참았던 감정이 북받치는지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딸이 고등학생이잖아요. 공부 때문에 힘들 때가 많은가 봐요. 그런데 언젠가 딸이 이런 얘길 하더라고요. 아빠가 일어나 ‘우리 딸, 공부 안 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아빠가 그 말 한 마디를 못한다고.”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어려운 교회를 도웁시다-국민일보·세복협 공동캠페인] 파주 ‘기뻐하는교회’
입력 2014-07-22 0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