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권혜숙] 근자감

입력 2014-07-21 02:31
초등학생 조카는 웬만한 단어는 줄여서 말하곤 한다. 처음 해외여행을 다녀왔을 때 감상을 “배힘졸”이라고 했다. ‘배고프고, 힘들고, 졸렸다’는 뜻이란다. 이렇게 조카가 만들어 쓰는 말도 있지만 덕분에 10대들이 자주 쓰는 줄임말도 많이 알게 됐다. 문상(문화상품권), 성괴(성형괴물), 버카충(버스카드충전)…. 그중 꽤 재치 있다 싶은 게 ‘근자감’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 오만이나 만용보다 더 세게 비꼬는 듯한 어감이 속 시원하다고나 할까.

사람들의 근자감은 여러 조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미국에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교수의 95%는 자신이 평균 이상으로 강의를 잘한다고 응답했고, 대학생의 96%는 자신이 평균 이상의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외모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올해 초 영국에서 발표된 설문에서 자신의 외모에 매우 자신 있다고 답한 남성이 70%에 달했다. 같은 답을 한 여성의 비율은 58%였다. 영국에서 짧게나마 1년 동안 거주했던 개인적 소견을 밝히자면, 영국 남성들의 근자감 맞다. 이런 응답이 자신감이 아닌 근자감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감과 실제 능력과의 연관성이 아주 낮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30%에 불과하다고 한다.

굳이 통계를 빌릴 필요도 없다. 술 한 잔 걸치면 자신이 아직도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주장하는 초로의 선배의 근자감을 자주 목격하는 터다. 이 정도는 애교다. 지명된 지 33일 만에 “다 설명 드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며 사퇴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나 교수 자격조차 의심스러운 분이 교육부 장관을 하겠다고 나서는 근자감은 국가적 민폐다. 친구를 시켜 살인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도 자신은 무사하리라 믿는 시의원의 근자감에 이르면 무서워질 지경이다.

최근 국민일보 미션면에 인터뷰가 실렸던 재미교포 2세 마이클 오는 하버드와 펜실베이니아대 석·박사를 포함해 5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는 이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 제목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다. 신앙이 있기에 가능한 고백이겠지만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겸손의 힘을 느끼게 한다. 성격심리학의 대가라는 토마스 차모로 프레무지크 박사의 책 ‘위험한 자신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신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없어야 모든 걸 이룰 수 있다.” 그의 충고대로 근자감보다 진짜 필요한 것은 자신감과 능력 사이의 차이를 줄이는 일일 것이다.

권혜숙 차장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