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우선덕] 가훈

입력 2014-07-21 02:17

아버지를 자주 생각한다. 살아계신다면 그저 생각했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효녀 소리를 들었을 게다. 22일이 기일이라서 요즘은 아버지를 많이 떠올리다가 문득 ‘가훈’에 생각이 미쳤다. 아버지는 특별히 가훈을 세워주지는 않았지 않나. 그런데도 가훈 아래 성장했던 것 같은 착각은 어떤 연유인지. 아버지의 엄한 잔소리로 식구들 심신 편한 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아버지뿐인가. 어른끼리 약속이라도 했는지 아이들에 대한 잔소리는 한목소리였다. 죽으면 썩을 몸이다, 몸 아끼지 말고 부지런해라.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 역지사지가 뭔지 아느냐. 남의 흉을 보지 마라. 침을 길바닥에 뱉거나 쓰레기를 슬쩍 버리거나 무단횡단하지 마라…. 우리들은 절대 하지 않는데도 그럴까봐 항상 잔소리. 산길 길섶의 들꽃을 꺾거나 그런 행동을 할까 봐도, 나 하나쯤이야 하는 정신 상태가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거국적인 훈시까지 하곤 했다. 그러니 따로 간단히 가훈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으리라.

큰애가 어릴 때다. 붓글씨로 가훈을 써서 내는 게 숙제라며, “우리 집은 가훈 없지?” 하고 묻는다. “없긴, 써 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엄마가 노상 말하는 ‘죽으면 썩을 몸’이 가훈인 거야.” “그런 것도 가훈이 돼?” “그럼, 그런 게 진짜 가훈이야.” “정말?” 아이는 되묻곤 손가락으로 글자 수를 센다. 에게, 그런데 글자가 너무 조금이다. 인생의 깊은 뜻과 제대로 된 삶의 방향이 그 여섯 자에 다 들어있으니 기가 막히게 훌륭한 말씀인 거란다. 그렇게 자란 덕분에 엄마가 요 정도라도 사람이 된 거라고. 아이가 여전히 글자 수를 아쉬워하기에 그 옆에 한 가지 곁들여줬다.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도 좋다.’ “어떤 음식이든 고맙고 맛있게 골고루 잘 먹어 건강하자는 뜻이야.” 그 후 가훈 이야기가 나오면 큰애의 원망을 듣는다. “그거 냈다가 아이들이 얼마나 웃고 놀렸는지 알아요?” 엄마 때문에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지! 속뜻은 여전히 좋아 생의 방향타가 되지만 큰애를 곤경에 빠뜨렸다니 미안하다.

세월이 흘러 동료 선생과 대화 중에 가훈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진작부터 아이들에게 간여 안 했어요, 가훈을 딱 이렇게 정했거든. ‘알아서 해라.’ 세상에, 과연! 무릎을 쳤다. 죽으면 썩을 몸보다 훨씬 함축적이고 자립적이지 않은가. 그날부로 당장 두 아이에게 가훈의 변경을 통보했다. 이제 바야흐로 아이들도 그 어미도 진정한 홀로서기를 덤으로 얻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우선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