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선 너머 상대방은 “놀고 있네” 한마디를 내뱉고 전화를 뚝 끊었다. 이런 투의 말은 철든 이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회사 책상으로 걸려온 전화인지라 기분 나쁜 내색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기분 좋은 오후를 망치게 만든 그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통신입니다. 귀댁의 유선전화 서비스가 내일 중단될 예정입니다.” 당장 뭔가 하지 않으면 전화선을 끊어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귀댁 운운한 것을 보면 상대방은 무작위로 다이얼링을 한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KT로 사명이 바뀐 게 2001년인데 아직도 한국통신을 들먹이는 것까지 보면 보이스피싱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가입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느냐”고 물어왔다. 회사 이름을 댔다. 그제야 상대방은 속내를 들킨 게 분한 듯 “놀고 있네”란 말을 던지고 전화를 끊은 것이다.
다음날 집에서 똑같은 내용의 전화를 또 받았다. 부재중 전화 목록을 보니 수상한 번호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싶어 경찰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물질적 피해가 발생해야만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정신적 피해만 입은 사람은 하소연할 데도 없는 셈이다. 피싱 때문에 심리적 공황을 겪은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속만 태우고 말았을까.
금융사기 피해자들은 긴가민가 경황없는 가운데 몰라서 당하고, 눈뜨고 당하고, 알고도 당한다. 우리 국민 10명 중 7, 8명은 피싱 전화를 받은 적이 있고 한해 5000여명이 실제로 돈을 뜯긴다고 한다. 심지어 법원장, 교수, 정보보안 전문가 부인도 피해를 봤다고 하니 ‘그놈 목소리’는 대체 얼마나 질기고 음험한 걸까. 속 보이는 ‘한국통신 피싱’ 소동을 겪고 나니 몇 년 전 치 떨렸던 피싱 전화가 떠올랐다.
“거기 최○○씨 맞죠? 여긴 ○○○ 검사실입니다.” “당신 주민번호가 ○○○○○○이죠? 농협에 개설된 당신 통장이 해외불법 송금에 이용되었습니다.” 자신을 김○○ 검사라고 소개한 젊은 남성은 내 개인정보를 꿰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고 빠른 말투로 “농협의 당신 통장을 통해 해외로 수천만원이 빠져나갔으니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대라”고 압박해 왔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검사실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번호 하나를 불러줬다. 들키지 않게 유선 번호를 눌렀지만 그는 “뭐하는 것이냐”며 역정을 내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너무나 뜻밖에도, 아니 다행스럽게도 유선으로 연결된 전화는 ‘진짜’ 검사가 받았다. 그 검사는 “요즘 검사를 사칭한 금융사기가 극성입니다. 통장 번호나 비밀번호를 이야기한 건 아니시죠?”라고 물었다. 나는 보이스피싱의 치밀함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내가 겪은 위의 두 사례는 사실 고전적인 수법에 속한다. 요즘 들어선 어눌한 한국어에 옌볜 사투리로 금융정보를 요구하는 피싱은 줄어들고 기상천외하게 진화한 보이스피싱이 다시 늘고 있다. 금융사기 불안감을 역이용, 피해방지 조치를 가장하거나 기초연금의 시행을 앞두고 연금을 더 받아주겠다고 어르신들을 울린다니 그들의 기발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답답한 것은 우리 정부 대응이 더디기만 하다는 점이다. 스미싱, 피싱 등에 이용되는 발신번호 조작이 진작부터 문제가 되었는데 통신3사를 통한 본격적 금지는 이달 말이나 돼야 시행한단다. 중국발(發) 피싱 문제에 대해서도 손놓고 있는 인상이다. 한국의 ‘라오펑유’(오랜 친구)라고 자처하면서 벗의 지갑을 터는 일부 ‘낚시꾼’들의 불법행위에 반쯤 눈감은 지 오래다. 이달 초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어업 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모바일 사기 근절책도 의제에 올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피싱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연내 타결 노력보다 금융사기 방지 한·중 공조를 더 근사한 선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위험 사회다.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조직화된 무책임’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를 위험 사회라 부르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위험의 일상화, 글로벌화 속도가 광대역 LTE-A급 ‘빠름 빠름 빠름’이다.
이러한 무뢰한 사회의 등장은 개인의 경각심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부 차원의 총력전과 국가 간, 도시 간 공조가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문제에 대해 전(全) 지구적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아시아도시연합을 제안한 바 있다. 유럽연합(EU)처럼 서울 베이징 타이베이 호찌민 등 대도시가 머리를 맞대고 기후변화, 초미세먼지 등의 해법을 논의해 보자는 것이다. 의제에 금융사기까지 포함되면 더 좋겠다.
이제 책임 있는 당국의 각성과 ‘낚시꾼’들의 변화무쌍한 창에 맞설 창조적 방패를 기대해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금융 사기범들을 향해 “놀고 있네”를 외칠 그날을 그려본다. 그런데 과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최민영 종합편집부 선임기자 mychoi@kmib.co.kr
[창-최민영] 피싱은 빠르고 대응은 더디고
입력 2014-07-19 0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