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즘 에스컬레이터에서 걷지 않기로 한 작은 결심을 실천하고 있다. 결과는? 매우 답답하다. 자동차의 차로 변경에 대해서는 아직 결심을 못하고 있다. 필자가 자주 다니는 길은 출근길에 자주 막히는데 특정지역을 하위차로로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상위차로로 옮기면 상당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불법적인 끼어들기는 아니지만 상위차로가 느린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순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중에 광역버스 입석금지 시행에 대한 뉴스를 접했다. 전면시행을 앞두고 홍보가 있었겠지만 막상 시행일의 풍경은 당황 그 자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버스는 몇 대 놓치면 30분도 더 기다릴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가 통제하지 않으면 금방 불법과 무질서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것이 이른바 ‘빠른 것을 선호하는 관행’의 힘이다. 우리들은 느린 것을 잘 못 참는다. 그래서 그냥 느리다고 안 하고 느려 터진다고 말한다. 제목을 ‘불편하지만 안전하게’라고 적었는데, ‘느리지만 안전하게’라고 적어도 될 것이다.
우리가 한 번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느리다와 불편하다가 거의 동의어처럼 취급하는 우리들의 생각은 당연한 것인가. 해가 강렬한 나라들의 국민성은 일반적으로 느긋하고 느리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면 해결될 일처리가 그런 나라에서는 1주일이 넘게 걸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발을 동동 굴리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게으른 것인가. 운동을 잘하는 국가를 비교해보면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새로운 공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우리들은 느리다와 불편하다와 함께 게으르다를 동의어처럼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에서는 느린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속도가 높을수록 안전하지 않은 건 왜 그런가. 그것은 유념해야 할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다면 속도가 높아도 여전히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답이 나온다. 우리가 높일 수 있는 속도는 간과하지 않고 유념할 역량의 최대치까지이다. 그 이상의 속도는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 당연히 유념하는 역량은 사람마다 다르다. 역량이 적은 사람은 느리게 지내야 안전하다. 여러 사람이 있을 경우 안전에 있어서는 상향 평준화는 불가능하다. 하향 평준화를 통해서만 기본적인 안전이 확보된다. 그렇다면 그 이상의 역량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불편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가 안전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하면서 그 불편을 감수하기로 서서히 결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야말로 복된 소식인 것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탄원하는 시편 기자들의 심정을 헤아려보자. 기다림에서 나타나는 답답함이 묻어난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에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으신다는 전갈이 온다. 이러한 느림의 주제는 줄서서 내 순서가 언제 오나 하는 답답함과 비교하기엔 너무나 큰 인생 주제들이지만, 사소한 느림의 답답한 상황에서 인생을 한 번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개인의 결심으로만 해결될 일은 아니다. 뉴욕에서는 교통 상황으로 출근이 늦어지는 것에는 관용이 많다고 하더라.
심장병 전문의 프리드만과 로젠만은 성격을 A와 B형으로 나누고 비교하니 A형에서 관상성 심장질환이 더 높다는 보고를 하였다. 두 성격유형은 혈액형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A형은 한 번에 여러 일처리를 하고 성격이 급한 반면 B형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처리를 하고 성격이 느긋한 편이다. A형이 일을 많이 한다는 것 자체보다는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을 감수하는 것에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KTX가 생겨서 서울에서 부산 가는 시간이 반 정도로 단축되었다. 시간을 번 셈이다. 번만큼 일을 더해야 할까 아니면 그만큼 여유를 누려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불편하지만 안전하게
입력 2014-07-19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