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펫과 함께 50년 재즈는 나의 영혼

입력 2014-07-19 02:24
재즈앙상블 '뿌리'의 멤버들. 피아노 김한나, 콘트라베이스 조은정, 트럼펫 최선배와 하승국, 드럼 원익준, 하프 이기화. 뿌리 제공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들고 있던 트럼펫 밸브에서 손가락을 떼며 물었다. “혼자 계속 하라고?” ‘한국 재즈의 전설’로 불리는 트럼페터 최선배(71·사진)이다. 리허설 연주 중 그의 파트가 길어진 모양이다. “하, 하, 하” 맞은 편 젊은 콘트라베이시스트 조은정과 드러머 원익준이 대선배의 푸념에 크게 웃는다. 피아니스트 김한나(35)가 웃음 띤 얼굴로 “(최 선생님) 힘드시니 쉬셔야지”라며 중재에 나선다. 밝고 유쾌한 리허설 분위기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복합문화공간 ‘반쥴’ 4층. 최씨는 재즈 아티스트 4명과 19일 시작되는 재즈페스티벌 ‘서울재즈원더랜드 2014’ 레퍼토리를 연습했다. “23번째 마디부터 천천히 풀어줘”라고 자상하게 조언하는가 하면 “알아서 하라”고 후배에게 해석을 맡기기도 했다. 서울재즈원더랜드는 행사 팸플릿에서 그를 ‘한국을 대표하는 재즈 1세대’라고 소개했다.

낮부터 5시간 넘게 이어진 리허설 후 그와 마주 앉았다. 작은 안경에 수염을 기른 얼굴은 인정 많은 할아버지와 같은 느낌이었다. 음악 평론가들은 그를 ‘가장 부드러운 프리 재즈맨’ ‘다른 연주자를 뒷받침하는 트럼페터’라고 평가한다. “다른 사람이 (저를) 그렇게 말한다면 맞을 수도 있겠죠.(미소) 사람이 자기를 알기 어렵잖아요.” 사실 수 십년씩 차이 나는 후배들과 격의 없이 연주하기 쉽겠는가.

“앙상블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팀워크’(Teamwork)예요. 상대가 좀 부족하면 부족한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 맞춰야 해요. 나만 잘 할 수가 없어요. 나만 잘하려고 하면 앙상블이 깨져요. 그건 선배 동료 후배 누구랑 연주하더라고 마찬가지죠.” 최씨는 동아예술방송대학에서 ‘앙상블’과 ‘트럼펫 연주’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서울 은평감리교회 원로 장로이다. 1976년부터 매주일 은평감리교회에서 트럼펫을 연주한다. “교인들의 장례예배 때마다 조가(弔歌)를 연주해요. 찬송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338)과 ‘하늘 가는 밝은 길이’(493)를 많이 연주 합니다. 매년 10∼20명의 장례가 있으니 제 조가로 하늘나라 보내드린 분도 수 백 명이겠네요. 그 조가가 하늘에 쌓여 제가 젊은 후배들과 함께 연주하는 지도 모르겠어요.”(웃음)

군대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본격적으로 배운 그는 64년 미8군에서 재즈를 연주했다. 90년대 이전 국내에는 재즈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70∼80년대 캬바레나 나이트클럽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과 같은 대중가요를 연주했어요. 제가 원하는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번 그만 둘까 생각했어요. 아내와 두 아이 먹여 살리기도 힘들어 목숨 끊을 생각을 한 적 있고요.”

왜 트럼펫을 배우게 됐냐고 물었다. “그냥 좋았어요.”(미소) 모두 가난했던 시절 트럼펫이란 악기를 동경하기란 쉽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어요. 외할아버지가 인천 강화도의 첫 감리교인이었어요. 강화중앙감리교회에서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자랐어요. 열 살 무렵 주한미군라디오방송(AFKN)에서 트럼펫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가 국내 재즈 무대에 데뷔한 지 50년. 최선배는 대한민국재즈동호회에서 1세대와 가끔 연주한다. 2세대를 포함한 ‘최선배 퀸텟(Quintet)’의 핵심 멤버이다. 3세대인 제자들과는 지난해부터 재즈앙상블 ‘뿌리’를 만들어 연주한다. 그는 한국 재즈의 ‘역사’이면서 ‘현재’이기도 하다. “후배들과 이렇게 같이 연주할 수 있어 너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은혜지요.”

제자들의 말은 다르다. “최선배 선생님과 같이 연주할 수 있어 영광이죠. 잘 이끌어주시고, 많이 배워요.” 뿌리의 피아니스트 김한나의 얘기다. 그는 평생 가난한 트럼페터로 살았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제게 ‘트럼펫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달란트를 받아 사람들을 위로하고 하나님 사랑을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고 한 적 있어요. 저도 이걸로 족하다,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최선배는 일본에서 재즈 앨범 프리덤(freedom, 1997)을 냈고 한국에서 A Trumpt In The Night Sky(2011)을 냈다. 다음달 1일 오후 7시 30분 반쥴에서 뿌리 공연 후 하반기엔 후배들과 음반을 준비할 예정이다. 밖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인터뷰 후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다. 서초구 교대역 근처 연습실로 간다고 했다. 트럼펫을 사랑하는 노신사는 저녁 식사도 잊은 것 같았다.

글=강주화 기자, 사진=허란 인턴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