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들이 외출했다. 한 사진전이 계기가 됐다. 18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전남 여수진남문예회관에서 열리는 '우리안의 한센인-100년만의 외출' 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성태(47·여수 시민교회·사진) 집사는 "연로하신 한센인들의 존재를 더 늦기 전에 알리고 싶었다"며 "그들이 정착촌이나 요양원 등에서 벗어나 앞으로 영화관, 전시장에도 자유롭게 다녔으면 한다"고 바랐다. 전시회를 앞둔 지난 15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마주한 편견, 믿음으로 소통하다
105년 역사를 간직한 여수 애양원과 함께 도성마을은 ‘한센인 마을’로 유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진전은 ‘잘 모름’에서 출발했다. “15년 가까이 여수 지역 신문사에서 근무했는데 도성마을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애양원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애양원 옆에 제가 모르는 세계가 있더라고요. 도성마을이요.”
모태신앙인 박 집사는 지난해 ‘여수 애양원 역사박물관 개관기념’으로 전시를 구상했다. 한센인의 피고름을 짜내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발자취를 담기 위해 애양원을 찾았다. 그러다 도성마을을 만났다. 처음 맞닥뜨린 곳은 폐허가 된 축사. 그는 “전쟁터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양계장에서 계란을 나르던 한센인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외적인 흉측함에 한번, 저와 같은 일상을 사는 어르신의 따뜻한 시선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편견을 안고 있었던 겁니다.”
그제야 깨달았다. 한센인 없인 손 목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한센인을 향한 불편한 시선을 깨야겠다고 다짐했다. ‘아, 여기를 기록해보자.’ 피사체의 주제가 손 목사의 발자취에서 한센인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박 집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발걸음이 도성마을로 향했다”며 “주님이 한센인을 향한 마음을 주셨다”고 확신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마을에서 살다시피 하며 한센인 근접 촬영에 들어갔다. 많이 힘들었다. “경계심이 워낙 강하신 분들이잖아요. 평생을 편견과 차별 속에서 지내오셨는데,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 마음의 문 여는 게 어디 쉽겠어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게 자신들 얼굴에 기관총을 겨누는 느낌이라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그들과 소통하게 된 건 이 신앙 덕분이다. 한센인, 일반인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게 통했다. “한센인 어르신들에게 신앙은 절대적입니다. 선교사님이 애양원을 설립했고, 영적인 아버지가 손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크리스천임을 먼저 밝히고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르신들이 찬송을 부르자고 하면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내 주를 가까이’를 자주 불러달라고 하셨어요. 그거 아세요? 한센인들은 성경 박사님이세요. 애양원교회 어린 학생들이 한센인 장로님 앞에서 성경암송 시험을 봐요. 장로님은 성경을 달달달 외우실 정도라니까요. 한센인은 영적으로 강한 분들입니다.”
한센인, 우리안의 이웃으로 반기다
그는 애양원 ‘평안의집’과 인근 도성마을에 살고 있는 한센인 150명의 일상을 렌즈에 담았다. 다양한 사연의 주인공들을 만났다. 소록도에서 결혼한 신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마을로 이주했다. 일제 강점기 매일 밤 일본군 총소리 때문에 두려웠는데, 지금도 그 환청에 시달려 밤잠을 설친다. 남편의 영정을 꼭 품고 있다. 그 앞에서 거울을 보며 늘 예쁘게 화장하는 신 할머니는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다.
‘박카스 할머니’는 24세 때 결혼해 한달 만에 한센병에 걸렸다. 올해 89세 할머니는 손 목사님과 애양원에서 같이 생활했다. 기억력이 좋고 명랑하신 할머니는 손, 발이 없다. “제가 마을에 갈 때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라고 여쭈면 할머니는 ‘박카스 사와’라고 하세요. 박카스가 그분들 음료예요.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한번은 마을에서 10마리 개를 키우는 할아버지가 박 집사를 불러 세웠다. 청각장애에 말은 어눌하고 냄새까지 심한 할아버지는 율촌까지 태워달라고 했다. 도착한 곳은 백합식당 앞. 할아버지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주머니는 할아버지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음식을 내왔다. “한센인이 오는 것 알면 장사가 안될 텐데”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아주머니는 어느새 알아차리고 답했다. “우리 아들이 이분들에게 더 잘해주라고 했어요.” 아주머니는 ‘하하’ 웃더니 할아버지와 정답게 식사했다. 전율이 느껴졌다. 무표정했던 할아버지도 아주머니 앞에서 활짝 웃었다. 박 집사는 쉴새없이 셔터를 눌렀다. 마주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은 아름다운 이웃이었다. 이 한 컷이 전시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우리 곁의 아름다운 이웃.
촬영은 잘 마쳤다. 그러나 어르신들이 전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20년 동안 도성마을에서 사역해온 도성교회 송찬석(50) 전도사가 “작품을 보고 판단하자”며 중재에 나섰다. 어르신들을 모셔다 교회에서 사진들을 먼저 공개했다. 며칠 동안 마라톤회의가 이어졌고 결국 사진전 허락을 받았다. 송 전도사가 중재에 나선 이유는 안타까운 마음에서였다.
16일 전화 인터뷰에서 송 전도사는 “한센인들은 혹여 자신들의 노출로 인해 후손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1세대 한센인들은 거의 후손들과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2, 3세들 역시 한센인 후손임을 밝히기를 꺼린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희 장인, 장모님도 모두 한센인이셨습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자신의 딸에게 고아로 속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족들 앞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그게 한센인들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심리적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할까요. 이제는 한센인 2, 3세들이 경계의 울타리를 넘어서 문화적 충격에서 벗어나 사회와 소통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송 전도사는 한센인 3세들을 대상으로 실내악단도 꾸려 올해 안에 첫 연주회도 가질 계획이다.
박 집사는 “어렵게 전시가 이뤄진 만큼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한센인들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우리안의 한센인’은 ‘우리안의 이웃’이다. 이젠 그들의 외출을 반길 때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애양원 한센인 100년만에 길을 나서다
입력 2014-07-19 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