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장 야이로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전해주신 그분의 '뜻'은 강력하고도 또 충격적이었다. 예수께서는 나인성으로부터 가버나움으로 이어지는 '손'의 메시지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 53:10)
그것은 그 앞의 기사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하나님의 아들이 그 ‘말씀’으로 병든 자를 낫게 하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하게 할 것이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글에 계속해서 나오는 ‘공평’의 원칙 때문이었다.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사 28:17·한글개역판)
이 공평과 의는 하나님의 권위를 지키는 절대적 기반이었다.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하나님은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죄인에게 벌을 내리신다. 즉 권선징악, 신상필벌의 원칙이다. 이것이 깨지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을 떠나 죽음과 타락의 길로 간 사람을 그냥 살려주거나 복권시키면 그것은 공평치 못한 처사가 되고, 사탄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욥 2: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공평’의 원칙을 지키시려면, 하나님 자신이 ‘아픔’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픔을 당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고,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은 곧 속건제물(贖愆祭物)이 됨을 의미했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씨’를 보게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삭을 드리려고 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맹세하며 주신 약속에 그 ‘씨’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여기서 네 ‘씨’는 대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말씀을 보면 그것이 단순한 혈통적 ‘자손’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천하 만민이 구원받을 기회를 다시 한번 주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씨’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을 의미한다면 복음서에서 그것은 나사렛의 목수 ‘요셉’이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의 출생과 관계가 없다. 여기에 기록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 아브라함이 그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치려 했던 그의 ‘믿음’이었다. ‘그가 씨를 보리라’는 이사야서의 메시지를 받고 예수께서는 곧 바닷가에 나가 ‘씨’에 관해 말씀하신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이 큰 비밀은 비유로 전해졌다.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4∼8)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묻자 그분이 일러 주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그리고 다시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10)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19∼22)
역시 ‘씨’란 말씀을 준행하는 ‘믿음’과 ‘순종’을 뜻하는 것이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마 13:23)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
그래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에 관한 비유, ‘바다에 친 그물’의 비유 등이었다. 그 모든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그분과 함께 있게 되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모든 비유들의 초점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 그분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속건제로 드려지는 ‘말씀’의 아픔 위에 세워진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일으킨 그분의 손뿐만 아니라 혈루증 여인이 손댔던 그분의 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아픔을 당해야 할 속건제물이었다.
아들의 순종으로 드려질 그 아픔은 겨자씨와 누룩처럼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이고.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추수의 날에는 그 아들의 말씀이 곡식과 가라지를 가려내고 그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가려낼 것이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0) 천국의 비밀을 안다는 것
입력 2014-07-18 0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