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전대] 마침내 ‘여당 무대’ 중심에 우뚝 선 ‘무대’… 김무성 신임 대표 선출과 인생 역정

입력 2014-07-15 03:37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가 14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뒤 함께 손을 잡고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인제 서청원 최고위원, 김무성 대표, 김을동 김태호 최고위원. 김태형 선임기자

새누리당 김무성(62) 신임 대표는 7·14전당대회를 앞둔 지난달 30일 국민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운명”이라고 말했다. 뭉쳤다가 소원해지기를 반복한 두 사람은 대통령과 여당 대표로 다시 만나 운명을 이어가게 됐다.

김 신임 대표의 정치 역정에서 두 번의 공천 탈락을 빼놓을 수 없다. 한 번은 친이(친이명박)계로부터, 또 한 번은 자신이 속했던 친박(친박근혜)계로부터 당했다. 이런 경험은 김 의원이 정당 민주주의와 공천 개혁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김 신임 대표는 14일 전당대회 직후 기자회견에서 주요 당직자 인사에 대해 “재보선이 끝난 후 대탕평 인사를 하겠다”며 “그동안 당에서 소외받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큰 표차로 이긴 데 대해 “나이와 당 경력, 지난 대선과 19대 총선 때 당에 기여한 공로로 보면 당 대표를 할 때가 됐고 그게 순리”라고 했다.

당 대표 수락연설에선 “풍우동주(風雨同舟)라는 표현처럼 어떤 비바람이 불더라도 우리는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고 했다. 무엇보다 당 화합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2010년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세종시 수정안’을 주장하다 ‘원안’을 고수한 박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앙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야전침대에서 눈을 붙이며 박 대통령 당선에 힘을 쏟았다. 대선 승리가 확정되자 그는 ‘이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란 메모를 당사에 붙이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4·24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부산 영도구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돼 5선에 성공했다.

김 신임 대표는 자신의 본명보다는 ‘무대’(무성 대장)라는 별칭으로 통한다. 1951년 부산에서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고 골목대장 시절에 이 별명을 얻었다. 큰 체구와 거침없는 언행, 선 굵은 정치 스타일에 잘 맞는 호칭이라는 데 어느 정치인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부산 경남중, 서울 중동고,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1976년 동해제강 상무, 1982년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지내면서 ‘젊은 기업가’로 이름을 알렸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4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멤버로 정치권에 들어왔다. 대표적인 상도동계 정치인으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원내대표·사무총장 등을 두루 지냈다. 2007년 대선 후보 당내 경선에선 박근혜 대통령 캠프의 좌장을 맡았다. 지난해 말 야당과 물밑조율을 하며 철도노조 파업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 신임 대표는 2011년 큰딸 결혼식을 평일 오후로 잡아 조용히 치렀다. 지난해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장례식을 치른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회자된 바 있다. 그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부인 최양옥씨와 1남2녀를 두고 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