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재호] 언론은 안전지대인가?

입력 2014-07-15 02:19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 유럽연합사법재판소(ECJ)가 지난 5월 구글에 현재(現在) 개인의 명예에 반하는 과거(過去) 신문기사의 검색 링크를 중단하라고 명령하면서 전 세계인의 관심사로 떠오른 용어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구글이 그 후 유럽 이용자를 대상으로 개인정보 삭제 요청을 접수받은 지 한 달여 만에 7만건의 신청이 있었다니 가히 폭발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잊혀질 권리=기사삭제 오해

국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사로 인한 피해 구제와 예방 업무를 담당하는 고충처리인인 필자에게도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접수되고 있다.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기사를 삭제해 달라.” “이혼했으니 전(前) 배우자 관련 기사를 지워 달라.” “불우했던 시절 (역경을 이겨낸 미담) 기사를 보고 결혼할 상대가 헤어지자고 한다.” “장성한 자녀들이 내 과거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내려 달라.” 불편한 진실을 숨기고 싶은 이들의 주장을 보면 마치 ‘잊혀질 권리=기사삭제권’이란 부정확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원래 이 사건은 신문사에는 기사 삭제를, 구글에는 기사검색 링크 중단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에 스페인 개인정보 보호 기구는 기사 삭제 요청을 기각하고 구글의 검색 링크 중단 요청에 대해서만 받아들였다. 이에 반발한 구글은 스페인 고등법원에 소송을 냈고 스페인 고등법원이 ECJ에 판결을 구한 것이다. 말하자면 ECJ가 신문기사에 대한 구글의 기사노출 방식에 제한을 가한 것이지 기사 내용(원문)의 삭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논할 때 기사노출 방식의 제한과 기사 원문의 삭제 여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집회·시위의 장소와 시간을 일부 제한하는 것과 집회·시위 자체를 불허하는 것은 헌법상 큰 차이가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구글 사례와 똑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언론중재 및 피해에 관한 법률(이하 언론중재법)도 기사 원문을 건드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정보도·반론보도·추후보도(무죄 등) 등의 청구권도 기사 원문에 부분적 손질을 가하는 것이지 삭제 같은 전면적 제한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 판례도 악용소지

이런 상황에서 우리 대법원이 지난해 3월 확정한 기사 삭제 허용 판례는 잊혀질 권리 논쟁에서 언론에 찬물을 끼얹는 불씨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대법원은 노컷뉴스를 상대로 기사 삭제를 요구한 소송에서 침해 행위의 금지(기사 삭제)를 구할 수도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대법원은 ‘표현 내용이 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 아닌 기사’일 것과 이 ‘기사로 인해 피해자의 명예가 중대하고 현저하게 침해받고 있는 상태’일 것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다. 민사상 손해배상과 정정보도 등 명예 회복을 위한 처분과는 별도로 기사삭제요구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진실이 아닌 경우’다. 대법원은 그동안 ‘기사가 (허위일지라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상당성)’ 등이 존재할 경우 언론의 민형사상 책임을 면해줬다. 하지만 이번 판례는 언론사의 상당성과 관계없이 ‘허위보도’만으로 기사를 삭제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놨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의 기사를 심사할 때 인격권과 알권리, 공익과 사익의 경중이 같지 않을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식이라면 일부 오보(誤報)의 의미가 내포된 무죄 판결의 경우 모든 관련 기사를 삭제하는 쪽으로 확대해석 내지 악용될 수 있다. 앞으로 공적 관심이 큰 정치인과 저명 인사의 스캔들일수록 수십∼수백 건의 기사를 모조리 삭제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 되면 언론의 자유와 알권리는 크게 위축되고 만다. 사회적 합의가 시급한 이유다.

정재호 디지털뉴스센터장 j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