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전직대통령 문화가 없다

입력 2014-07-14 02:05 수정 2014-07-14 02:38

며칠 전 이명박(MB)정부 시절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들과 참모들이 모이는 저녁자리가 있었다. 석 달만에 한 번씩 보는 얼굴들의 면면은 항상 달라진다. 이 자리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온 것은 단 두 번뿐이다. 지난해 말 송년회 때와 이번 모임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작년에 음주를 자제했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해 이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서 기자들보다 훨씬 많은 술을 마셨다.

좌중에서 누가 “전직 대통령 문화가 없다”는 말이 나오자, “좀 그렇지”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바빴던 5년에 비해 훨씬 한가해진 요즘의 일상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듯했다. 이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지금까지 공식 활동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텍사스 크로퍼드를 찾은 적이 있지만, 이것도 거의 주변에 알리지 않고 비밀여행 다녀오듯 했다. 지금 박근혜정부 인사들은 ‘MB’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008년에도 그랬다. 자신의 집권기간에 직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현직 대통령이 장악한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말이다. 이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4년 역시 ‘직전’ 대통령이 된 그 또한 별로 예우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1987년 ‘직선 개헌’ 이후 한국에는 5년마다 한 번씩 전직 대통령이 양산됐다. 그때마다 그들은 자의반타의반으로 현직 대통령, 아니 정부와 국정 전체와 담을 쌓아야 했다. ‘뒷방 노인네’ 취급을 당한 것이다. 그들이 속했던 정당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으니 국민들이야 더할 수밖에 없었다. 업적보다는 잘못으로만 기억됐고, 그 잘못 때문에 본인들 스스로 주눅이 들었다.

지난해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의 인천 송도 유치가 실현됐을 때 이 전 대통령은 근처에 가보지도 못했다. ‘녹색성장’을 집권기간 주요 국정 목표로 설정했고, 이 기구 유치에 가장 큰 역할을 했음에도 그는 사무국 개소식에 초청되지 않았다. 박근혜정부가 유엔 산하 기구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나 안데르스 포그 라스무센 전 덴마크 총리처럼 이 전 대통령을 지원해줬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쯤 전 세계에 ‘한국산’ 녹색성장 전략을 수출하는 선전대사쯤이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처럼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선 아직 수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한다.

‘테러와의 전쟁’ 공포를 일으켰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고향에 자기 기념관을 세워놓고 집권시절 교류했던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초청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강연료가 비싼 인사로 각국 정부와 싱크탱크, 대학의 초청을 받는다. 그가 여전히 당적을 유지하고 있는 민주당에서도 큰 행사 때마다 그를 불러내고,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조언을 구하기까지 한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자기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집권시절 도모했던 진보적인 어젠다를 젊은 미국 정치 지망생들과 외국 유학생들에게 설파하고 있다. 외국 언론들에 비친 이들의 얼굴이 어두웠던 것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전통도, 문화도 없다. 아직 우리 정치적 환경이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여의도 정가에는 이전 정부를 부정해야만 현 정부가 힘을 받을 것이란 잘못된 기대만 가득하니까 말이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