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재찬] 평화의 카이로스

입력 2014-07-14 02:23 수정 2014-07-14 02:38
크로노스(Chronos). ‘카이로스(Kairos)’와 더불어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모든 생명체에 똑같이 주어지는 객관적인 시간 개념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의미와 부합한다. 카이로스는 의미가 좀 다르다. 어떤 특정한 때나 기회를 나타내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 임신부가 뱃속에 아기를 열 달 동안 품고 있다가 출산했을 때, 복중의 열 달은 흘러가는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다. 그리고 산모가 해산하는 바로 그 순간을 ‘카이로스’라 할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시간 개념에는 카이로스를 의미할 때가 많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나 시기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마가복음 1장 14∼15절) 이 구절에 등장하는 ‘때’가 카이로스다. 전 인류를 향해 복음을 선포할 시기가 찼다는 의미다. 나아가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성취시키는 결정적인 시기, 또는 그런 기회를 뜻하는 고유 명사로 기독교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기도 한다.

2009년 12월, 팔레스타인 크리스천들이 모여 ‘카이로스 팔레스타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빚어지고 있는 갈등과 반목, 대립을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진실을 알리자는 취지에서다. 궁극적으로는 이·팔 분쟁을 종식하고 평화의 나라가 도래하는 하나님의 때, 곧 ‘평화의 카이로스’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폭력 등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한 이 선언에는 일부 유대인도 동참했다. 지난해 6월에는 이 선언문을 작성한 팔레스타인 목사가 방한해 카이로스 선언문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4년 7월, 이·팔 사이에는 짙은 전쟁의 먹구름이 감돌고 있다. 이스라엘 10대 소년 3명의 납치·살해 사건으로 촉발된 양측의 충돌은 ‘피의 보복’이라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타깃으로 한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공습은 닷새 동안 15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2012년 11월 ‘8일 전투’ 이후 최악의 충돌 상황이다. 성서의 땅 예수의 땅 이·팔 지역에 흐르고 있는 고통의 시간은 언제쯤 멈출까. 화해와 치유, 회복의 손길이 임하는 하나님의 시간, 그때가 차려면 아직 멀었는가. 이·팔에 평화의 카이로스가 선포되는 날은 언제쯤일까.

박재찬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