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인터넷에는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의 최고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43)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21분 분량의 영상은 알바그다디가 이라크 모술의 이슬람사원인 알누르 모스크에서 설교하는 장면이었다.
검은색 터번과 검정 옷, 그리고 검은 수염. 사뭇 위엄이 흘렀다. 그는 지난달 29일, ISIL이 추대한 칼리프(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대리인·키워드 참조)였다. 1924년 터키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가 폐지한 이래 90년 만의 재등장이었다. ISIL은 새 칼리프의 권한이 미치는 지역에서는 다른 국가나 토후국 등의 합법성이 무효화된다고 주장했다. 조직의 명칭도 ‘이라크·레반트’를 생략하고 ‘이슬람국가(IS·Islamic State)’로 변경했다. 이들은 칼리프 통치의 영역을 시리아 북부 알레포에서 이라크 동부 디얄라주에 이르는 지역임을 천명했다.
7세기 칼리프를 재현하다
ISIL은 칼리프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동안 공을 들였다. 알바그다디가 입은 검은색 옷과 터번, 수염은 정통 칼리프의 모습을 재현했다. 알바그다디의 이름에 포함된 ‘아부 바크르’는 초대 칼리프 이름에서 따왔다. 칼리프제 선포도 이슬람 금식월인 라마단 시작 당일이었다.
이슬람 역사에 따르면 첫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보다 두 살 아래 포목상이었다. 그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할 때 동행했다.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던 아부 바크르는 9살 난 딸 아이샤를 무함마드에게 시집보냈다. 아부 바크르는 2년간의 짧은 재임 기간 아라비아반도의 반이슬람 세력을 무찌르고 ‘지하드’를 명분으로 이라크 남부와 시리아 정벌을 시작했다. 지난달 모래폭풍처럼 출연해 바그다드 코앞까지 진격했던 ISIL의 행보와 유사하다.
ISIL의 깃발 역시 7세기와 닮아 있다. 검은 깃발의 상단에는 흰 글씨가, 하단에는 흰색 원안에 검은색 글씨가 쓰여 있다. 흰 글씨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뜻이며 검은 글씨는 ‘알라 선지자 무함마드’를 나타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서체는 7세기 초대 칼리프 시절 통용했던 동전의 글씨체와 비슷하다.
칼리프제는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
왜 ISIL은 칼리프제를 다시 선포했을까. 전문가들은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이 세속화됐고 서구세력과 손잡으면서 초기 이슬람 국가가 추구해오던 공동체(움마)를 상실했다고 보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바람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대부분 무슬림들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되기 전인 4대 칼리프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 원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염원이다. ISIL은 이 같은 희망을 읽어내고 칼리프제 국가를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반응은 싸늘하다. 오히려 알바그다디가 오른손에 찼던 명품시계 패러디만 증가하고 있다.
또 이슬람국가를 선포한 지 2주일여 지났지만 수니파 이슬람계까지 칼리프를 외면하고 있어 ISIL이 선포한 칼리프 국가 성립은 성공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ISIL이 지난 한 달 이라크에서 빠르게 세력 확장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이라크 인구의 35%가량을 차지하는 수니파의 지원이 컸다. 하지만 알바그다디의 칼리프 선언 뒤 아직 지지 의사를 밝힌 수니파 단체는 거의 없다.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ISIL과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1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중동의 극단주의 세력을 우려한다는 응답이 레바논 92%, 튀니지 80%, 이집트 75%, 요르단 62%, 터키 50%로 나타났다. 퓨리서치센터는 “이슬람교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들도 이슬람 극단주의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기도정보’ 저자인 패트릭 존스톤 선교사도 최근 방한해 “이슬람 과격단체의 테러가 심해질수록 다수 무슬림이 이슬람을 떠나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이슬람 테러리즘은 결국 이슬람을 더욱 약화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미애 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강사에 따르면 칼리프는 유대인의 시오니즘과 같이 극보수 무슬림의 이상이자 꿈이다. 그러나 ISIL의 칼리프제 국가 건설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국가주의 이해관계와 상충하게 될 공산이 크다. 당장 사우디아라비아도 ISIL이 수니파 세력으로써 이라크에서 시아파를 견제해주는 정도만을 원하지 ISIL의 최고지도자가 충성을 맹세해야 할 칼리프가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알바그다디의 칼리프제 선언은 이슬람국가 시각에서는 월권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 장관인 사우드 알파이살은 “ISIL은 이라크 국민의 뜻을 대표하지 않으며 그들은 명백한 테러리스트다”라고 말했다고 사우디 매체인 아랍뉴스가 보도했다. 그는 “우리는 ISIL을 혁명적인 시도로 보지 않는다”며 “그들은 이라크를 분할하려는 알말리키 총리 덕에 이라크에서 활동할 근거지를 확보한 것”이라고 힐난했다. 이 같은 그의 발언은 제41차 이슬람협력기구(OIC) 장관 모임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슬람 세계 전체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압둘라 사우디 국왕도 최근 대국민 연설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비난했다. 압둘라 국왕은 “일부 테러리스트들이 개인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이슬람을 내세워 이슬람교도를 겁주고 국가 통합과 안정을 위협한다”면서 테러단체 척결을 천명했다.
반면 ISIL의 출현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알카에다 분파였다가 지난해 초 독립한 ISIL은 창립 때부터 이슬람 역사 초기 시대처럼 범이슬람 국가 수립을 목표로 내세웠다. 전문가들은 ISIL의 칼리프제가 다른 이슬람권에서도 극단주의 운동을 결집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더구나 ISIL은 10년 전 김선일씨를 살해한 이라크 극단 수니파 무장조직인 ‘자마트 알타우히드 왈 지하드’(일신교와 지하드)의 전신이다.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에게도 위협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만석(한국이란인교회) 목사는 “칼리프는 원래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없는 초법적 존재”라며 “그는 법을 어겨도 되는 존재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칼리프는 세상을 무슬림과 그의 적들로 구분한다”며 “칼리프 통치에 들어오지 않으면 전쟁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과격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공요셉 중동아프리카연구소장은 “ISIL이 정치·종교적 지도력을 갖추고 있다면 장기간 존재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충족할 지도자는 없어 보인다”며 “ISIL 이후 또 다른 무장 세력이 경쟁적으로 출연할 개연성이 크다”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뉴스&이슈] ‘칼리프’ 재등장… 이슬람지역 기독공동체 위협
입력 2014-07-12 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