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썼을까” 몰라서 가능한 이야기들… 문단 젊은 작가 10명 단편집 ‘익명소설’ 출간

입력 2014-07-11 03:30
‘쓰고 싶은 것’을 눈치 안보고 쓰기 위해 모인 젊은 작가들이 소설집 ‘익명 소설’을 펴냈다. 사진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작가 로맹 가리. 그의 사후에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음산책 제공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무명작가가 프랑스 최고 권위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아자르가 실은 20년 전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 로맹 가리였음이 밝혀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한바탕 잘 놀았다”는 유서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가 익명으로 추리소설을 펴냈다. 독자와 평단의 반응은 미미했다. 두 달 뒤 그 작가가 ‘해리포터’ 시리즈의 조앤 K. 롤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소설은 곧 품절됐다.

자신을 완전히 숨긴 채 비밀스런 상상력을 가동시킨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다. 누군가의 억압,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 익명성은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다.

‘익명소설’(은행나무)은 바로 이런 익명성을 바탕으로 한 소설집이다. 우리 문학의 최전방에서 활동 중인 젊은 작가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에는 여느 소설집에서 볼 수 있는 작가 얼굴 사진과 출신 학교, 등단 매체, 문학상 수상 이력 등이 나와 있지 않다.

대신 ‘익명소설 작가 모임’이라는 이름아래 M, V, H, W 등 영문 이니셜만 있다. 참여 작가는 모두 10명. 출판사 기획자들이 이들을 비밀리에 만났기에 누가 어떤 소설을 썼는지 작가끼리도 서로 모른다.

작가의 자기소개는 그래서 신선하다. 이를테면 M을 보자. ‘아직 순수하던 시절 어느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다른 수상작들이 전부 야한 소설이라는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적었다. V는 ‘신비주의라는 말을 좋아한다, 벼락치기라는 말을 즐겨 행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W는 또 어떤가. ‘참 보통은 아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칭찬보다는 욕의 함량이 더 높은 것 같다’고 고백했다. H는 ‘건강식품 판매원, 관공서 계약직, 록 밴드 보컬, 성인영화 시나리오 작가, 심부름센터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라고 썼다.

이 소설을 기획한 은행나무 출판사 강건모씨는 10일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써보고 싶었던 이야기, 도발적인 내용 때문에 망설여져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하지만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첫 작품인 ‘물고기자리’는 경쾌하면서도 농밀한 문체로 육체적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새로운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선보였다는 평이다. ‘18인의 고백’은 세계 최대 문학상인 노벨문학상이 사실은 ‘뽑기’로 결정된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판타지 풍자소설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시인 김경주는 “이 책의 페이지를 펼치고 편견과 때 묻은 시야로 가득한 대기권을 탈출해보시라. 우주로 날아가려면 언제나 쓸데없는 무게의 연료통들을 하나씩 버려야 하니까”라고 평했다.

작가들은 책 출간 후 1년 동안 비밀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그 후에는 각자 이름을 밝힐 수도, 안 밝힐 수도 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