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휴일 밥상에 가족이 모였다. 막 숟가락을 들 즈음 큰아들 녀석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엔 왜 스티브 잡스 같은 기업가가 없어요?” ‘어, 요 녀석 봐라.’ 며칠 동안 어린이용 잡스 전기를 읽더니 푹 빠진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애플에 견줄 만한 삼성전자 같은 훌륭한 기업이 많이 있단다.”
대답이 시원찮았나 보다. “에이, 그런데 존경할 만한 기업가는 없잖아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마땅한 반격 카드가 없다. “애플이 우리나라에서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사회공헌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할수록 뭔가 궁색해졌다.
“아빠, 반기업 정서가 뭐예요?” “왜 우리는 존경받는 기업이나 기업가가 없어요?” 궁지에 몰린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쉴 새 없이 약한 곳을 공격했다. 결국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너, 지난번 수학 시험 몇 점 받았지? 문제집 좀 풀어.” 한숨 돌리니 답답해졌다. 스스로도 궁금했다. 왜 우리 기업과 기업가는 존경받지 못할까.
2주 정도 지나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부회장과 점심 자리가 있었다. 이 부회장은 우리 기업이 지키려고만 하고 도전을 두려워한다고 꼬집었다. 30대 기업의 나이를 뽑아보면 평균 62년이고, 30년 미만 기업은 1곳밖에 없을 정도로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우리 기업이 앓고 있는 병을 ‘성장 공포증’ ‘피터 팬 증후군’이라고 진단했다.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으며 네버랜드에서 사는 피터 팬처럼 ‘성장’을 거부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우리 기업은 성장 혹은 도전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1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지난해 말 기준 471조원에 이른다. 2012년과 비교해 40조원가량 늘었다. 투자를 하지 않는다. 30대 그룹의 올 1분기 투자액은 20조513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 늘었지만 삼성을 빼면 되레 4% 줄었다.
기업들은 항변한다. 투자할 곳도, 투자를 할 만한 사업도, 투자를 유도할 만한 정부의 정책도 없다고. 과연 그럴까.
40∼50년 전 우리 기업과 기업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부의 정책 지원이 없더라도 미래를 내다보고 성장엔진을 찾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1974년 사재를 털어 망해가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고 이병철 회장이 ‘그 돈으로 텔레비전을 몇 대를 더 생산할 수 있는데’라며 타박을 해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미래를 본 것이다.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했다. 이후 20년 동안 한번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라는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최근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은 과거 우리 기업이 그랬던 것처럼 역동적이다. 지난 10년 동안 구글이 인수·합병(M&A)한 기업은 약 130개에 이른다.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등 걸출한 기업들은 신생 벤처로 시작해 스마트폰으로 산업 생태계를 바꾸고, 모바일·온라인 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이제 무인항공기, 무인택배, 무인자동차 등 미지의 영역으로 뛰어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수많은 ‘피터’들이 네버랜드를 떠나 현실에서 미래를 찾길 바란다. 투자할 곳이 없다거나 경제 상황이 불확실하다는 말은 이쯤 해두자. 기업이 국민과 국가에 진 빚을 갚는 방법도, 기업 스스로 생존의 미로를 헤쳐 나가는 길도 모두 ‘도전’에 있다. 그래야 우리도 박수쳐줄 기업과 기업가를 갖게 되지 않겠나.
김찬희 산업부 차장 chkim@kmib.co.kr
[뉴스룸에서-김찬희] ‘피터’를 부탁해
입력 2014-07-11 0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