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행주교회] “언더우드 처치!”… 전쟁통에 그 한마디는 교인을 구했다

입력 2014-07-12 02:46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행주산성 행주교회
‘뾰족당’ 예배당. 행주나루터엔 개신교와 천주교 교회가 나란히 있었다. 아이들은 각기 ‘뾰족당’과 ‘납작당’ 교회라고 불렀다.
지난 5일 주일 예배 후 교인들과 인사하는 정건화 목사(왼쪽).
지금의 행주어업포구. 소규모 한강 고기잡이가 이뤄진다.
"행주산성에 교회가 있다고요? 그것도 125년이나 됐어요?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가 세웠다니 더 놀랍네요."
지난 5일 주일. 산성 정문에서 1㎞ 남짓 더 가면 오른쪽으로 급경사길이 나타나고 그 길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행주교회(1890년 창립) 지붕이 보인다. 교회 마당은 흙마당이다. 그 마당 가장자리엔 밤나무와 감나무 등이 우뚝하다. 녹슨 종탑 꼭대기에 마른 덩굴식물이 종을 감싸고 있다. 종탑 아래엔 교인의 쉼터인 정자가 자리했다. 정자 기둥 사이로 푸른 한강이 도도하게 흐른다. 그 마당에서 몇 계단 내려가면 반듯한 양옥 사택과 작은 마당이 맞춤하게 자리했다. 핸드볼 골대와 합성수지로 만든 미끄럼틀이 마당에 덩그렁하다.

이날 예배당 입구에선 흰 모시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은 권사 한 분이 부지런히 인사를 하며 주보를 나눠줬다. 대개들 자가용으로 교회에 닿았다.

정건화(52) 목사는 ‘무엇을 염려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앞서 찬송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였다. 이어 한철근 장로가 기도했다. 정 목사는 “염려는 사람을 서서히 죽게 하는 병”이라며 “백합 한 송이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려준 말씀에 주목하라”고 일깨웠다. 정 목사는 부임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다. 한강이 보이는 교회와 사택에서 기도하고 잠이 든다고 했다. 새들의 지저귐은 새벽기도를 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복음전진기지

행주교회 위치는 행주대교 남단에서 북단 방향을 보고 오른쪽 산자락이다. 주봉인 행주산(125m)이 뻗어 나온 끝자락이다.

언더우드 부인 릴리아스 홀튼은 행주대교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행주였다. 이곳은 서울에서 10마일가량 떨어진 강가의 지저분한 어촌이었다. 이곳에는 콜레라가 유행하던 직후인 1895년 가을에 신화순이라는 조선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 전도가 시작됐다.’

1928년 발행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기록.

‘1894년에 선교사 원두우(언더우드 한국명)는 전도의 방침을 확장하여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유흥렬 등으로 경성지방을 전도케 하고 신화순 도정희 이춘경 등으로 고양 김포 등지에 전도케 하니 4, 5개의 교회가 신설되고….’

두 사료에 따르면 행주교회 설립 연도는 1894∼95년이다. 그러나 행주교회는 구술 등을 종합해 설립 연도를 1890년으로 보고 지난 1990년 10월 9일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다. 언더우드가 행주리에 사는 한귀련댁에서 예배를 드린 것을 기점으로 삼았다. ‘1890년 언더우드의 주선으로 신화순과 도정희의 전도로 교회가 세워졌다’고 정리했다. 신화순은 조사(助事·전도사 격)로 언더우드 사역지인 서울 정동에서 언더우드 등으로부터 복음과 보건 지식을 익혔다. 그리고 전도에 나선 신화순은 서울 연희동고개를 넘어 행주에 닿아 전염병이 창궐한 행주리에서 복음 전파와 전염병 예방에 힘썼다.

당시 행주리, 즉 행주나루터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육로가 활성화되지 못한 시절 해로와 수로를 이용한 물자 이동이 보편적이었다. 선교사들은 동력선을 이용해 한강 뱃길을 따라 전도 여행에 나서곤 했다. 행주나루터는 바다와 강의 경계에 자리한 어업기지이기도 했다. 또 조선 최대 나루터이자 어시장인 마포나루 배후 기착지였다.

따라서 정동에 정착한 언더우드가 서쪽, 즉 강화·제물포(인천) 쪽으로 이동하며 교회를 개척할 무렵 행주나루터는 복음 전진기지가 됐다. 전통의 김포제일교회 등이 이 무렵 세워졌다.

고양 지역에선 행주교회가 첫 교회다. 행주교회는 1893년 사산교회(지금의 능곡교회) 분립, 1928년 개화리교회 개척 등을 이어갔다. 개화리(현 서울 개화동 일대)는 행주나루터 맞은편이었다.

육로 발달로 나루터 쇠락하며 오지가 돼

“행주나루터는 능곡보다 더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도성 한양으로 통하는 나들목이었죠. 쌀과 소금 거래가 활발했고 어물 도매가 이뤄졌으니까요. 당연히 관청과 서원이 자리했죠. 행주교회는 경기 북부 복음의 전진기지가 됐습니다.”

이날 김신규(73) 원로장로는 신앙의 선대와 행주리 옛 풍경을 복원해냈다. 이곳에서 6대째 예수를 믿는 신앙 명가의 좌장이다.

8칸 초가집에서 출발한 행주교회당은 15칸 한옥, 블록벽돌 건물 등으로 바뀌며 세대를 이어왔다. 교회 터도 강변에서 산등성이로 올라가며 이어졌다. 한강 하구는 수해가 잦아 산등성이가 적합했다.

“지금이야 제방 때문에 치수가 가능하지만 옛날엔 지류와 수로가 많아 물난리를 겪곤 했습니다. 그 강과 수로를 이용해 예배를 보러 오기도 했고요. 저 어렸을 적 한강물이 두껍게 얼면 소가 이끄는 우마차가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행주교회는 선교 초기 수백 명의 교인들로 늘 은혜가 넘쳤다. 회당이 비좁을 정도였다.

그러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육로가 발달되면서 나루터 기능이 급격히 쇠락했다. 어업도 근해어업 발달로 내수면어업 규모로 줄었다. 잉어, 웅어, 장어 잡이가 고작이었다. 행주산성 또한 초라한 ‘황성옛터’가 되어 갔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하기 전까지 초목에 가린 성터였다”고 김 장로가 회고했다.

산성 마을도 한촌(閑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신앙만은 하늘 아래 물이 한곳에 모이듯(창 1:9) 계속됐다.

“예수 아니면 어찌 살았을꼬…”

“제가 열두 살 되던 해 6·25전쟁이 났어요. 전쟁 전 좌우익 갈등이 마을 안에서도 심했죠. 1950년 6월 말쯤 한강어업조합 간부였던 아버지가 지도면(당시 행정명) 내무서에 끌려가 창고에 갇혔어요.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죠.”

김진옥(74·전 철도공무원) 은퇴장로의 회한이다. 그는 김신규 장로와 사촌형제간이다.

“그런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후 어머니(이현순 권사·94)가 행상으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수수쌀 등을 서울 동대문시장에 가져가 팔고 물감, 비누, 실타래, 바늘 등을 떼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파셨죠. 어머니가 지금도 그러십니다. ‘예수 아니면 내가 그 세월을 어찌 살았을꼬…’.”

그 얘길 하면서 ‘늙은 아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에겐 교회가 놀이터였던 반면 어머니에겐 구원의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전쟁 중 행주리는 참화에 휩싸인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사령관은 행주나루터 건너편 개화산(125m)에 서울 수복을 위한 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마음이 급했던 교인 하나가 미군에게 잘 보이도록 행주산에 태극기를 꽂았다. 좌익이 이를 인민군에 고발했고 인민군 600여명이 행주리에 투입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교회 및 마을이 쑥밭 되기 직전이었다.

“남자들은 죄다 강 건너로 피신했어요. 그중 양안준(작고) 장로라는 분이 미군 대위를 만나 손짓 발짓으로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교회와 교인이 다 죽게 생겼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죠.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포로가 되셨던 분이었거든요.”

미군은 양 장로 얘기에 서울로 곧장 진격하려던 계획을 수정, 개화산에 숨겨놨던 수륙양용전차로 한강 도하를 준비했다. 그 전차가 개화산에서 내려와 물로 ‘처박히자’ 건너편 인민군이 탱크가 수장되는 줄 알고 환호했다. 수륙양용전차를 누구도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맥아더의 교회 위한 행주상륙작전

“미군이 수륙양용전차로 행주리 상륙에 성공했어요. 숲속에 인민군 시신이 즐비한 것을 저도 보았습니다. 미군 시신도 열두 명쯤 됐어요. 전쟁으로 교회당도 무너졌고요. 김신규 장로 집도 불탔어요.”

지금도 교회 인근에 그때 상륙기념비가 있다. 교회를 지키려 했던 교인들의 절박한 호소를 하나님은 당신 방식대로 들어주신 것이다.

당시 최빈국에 속했던 대한민국. 그 가난한 나라의 강제징용 포로였던 교인 하나가 미군 장교를 붙잡고 ‘언더우드 처치! 언더우드 처치!’를 외쳤다. 그리고 미군 대위는 원주민 크리스천의 그 한마디를 단박에 알아듣고 작전을 변경했다. 훗날 양 장로가 “그 미군 장교가 자신이 언더우드 아들이라고 하는데 가슴이 멎는 줄 알았다”고 구술했다. 그것이 ‘역사’가 될 수 없으나 ‘성령의 역사’가 되기엔 충분하다.

그 행주교회가 지금, 행주대첩을 이룬 권율 장군의 기개를 이어받아 제2의 선교 역사를 꿈꾸며 거기 그렇게 서 있다.


행주교회의 포부 "최고의 전원 교회 만들 것"


125년 전통의 행주교회 주일 출석 교인은 100여명 정도다. '오지 아닌 오지'가 갖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이다.

일단 이 지역은 원주민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음식점이 대부분이다. 그린벨트지역으로 묶여 있고 여기에 더해 문화재보호구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교통편도 나빠 개인 차량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교회 출석이 힘들다. 수년 전 대중교통이 들어오긴 했으나 자주 있는 편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고립감 등으로 목회자가 4∼5년 주기로 바뀐다. 제자 양육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 10명 중 8명이 원주민 출신 교인이다. 또 행주교회와 이웃한 100여년 전통의 천주교회 교세도 강하다.

최근 부임한 정건화 목사는 이를 정면 돌파해 최고의 전원교회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서울 강서와 서대문·마포, 행신과 일산 등을 배경으로 한 중심에 성읍교회가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봅니다. 제2의 선교 역사를 쓰기에 충분하죠. 저는 도시 속 전원교회로 성장시킬 겁니다. 산성공원과 한강을 품은 교회는 행주교회가 유일할 겁니다. 그만큼 아름답죠. 말씀 중심의 양육으로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교회를 만들 겁니다."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