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세상 읽기] 북한 문제를 다루는 법

입력 2014-07-12 02:51

“인민은 한 달 꼬박 일해도 30달러, 간부는 앉아서 하루 100달러를 번다.”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하는 한 실태조사에서 나온 발언이다. 우리 사회에도 북한의 실상이 공개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정파적 이득이나 이념적 편향성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면 북한사회를 미화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북한을 대하는 정책이나 방법은 집권한 정권의 성격에 따라 강온 양면 정책을 반복해 왔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폭압적인 정치집단을 다루어야 하는 우리로서는 때로는 실용주의 노선을, 때로는 원칙주의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실 문제를 다루는 정치인들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문제가 복잡하면 할수록 북한을 대하는 기준이나 잣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기준이나 잣대가 굳건한 윤리와 도덕의 토대 위에 우뚝 서게 되면 정권에 따라 개인적 취향이나 믿음에 따라 북한 문제를 다루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 폭압적인 정권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낭만적으로 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자국민을 대하는 것을 미루어 보면 상식이나 양식이 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성향을 미화하거나 좋은 점만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대북 정책에서 잘못이 있었다면, 우리가 선의를 갖고 대하면 그들 또한 선의를 갖고 우리를 대할 것이라는 상식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원형이 변화하지 않듯 특정 집단의 원형도 변화하기 힘들다. 특히 그 집단이 억압과 폭력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해 왔다면 더더욱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선의에 기초한 실용주의 노선은 본의와 달리 그들에게 핵무기를 개발할 재원 확보와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허용해 왔다. 선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혹은 집단에 따라서는 그 선의가 통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그들의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보상과 벌칙을 피부에 와 닿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돈이 드는 게 아니면 지금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조치들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이 땅에 혹은 제삼국에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모든 일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인륜에 위반되는 폭행을 범했던 모든 행위들은 가해자와 피해자 중심으로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체계화하는 방법은 오랫동안 국회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북한인권법을 조속히 법제화하는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행위가 기록되며 그 기록으로 말미암아 통일 이후에 적절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견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설령 악행에 대한 명령을 받는 당국자라 할지라도 한번 더 자신의 행위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우리 사회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북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해법 가운데 하나다.

또한 우리는 한반도의 절반 땅에서 폭정에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실상에 대해 공식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알려야 한다. 그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가 등에 대해 교육과 계몽 활동도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북한인권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 이런 운동들이 전개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가 자원의 일부를 그런 활동에 투입하는 일은 이 땅에서 올바름 즉, 정의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 내부의 정의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는 정의에 대한 갈급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수자의 권리 문제나 소외된 사람들의 보호, 지원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한반도의 또 다른 반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 유린이나 잔혹 행위에 대해 눈 감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 곳곳에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회적 관계에서도 공의를 추구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7) 정의와 공의는 불의와 반대되는 단어다. 간단히 말하자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질서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불의가 판치는 것처럼 보이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구현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인간적인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노력을 다하고 있는가? 이따금 던져보게 되는 질문이지만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답을 선뜻 내놓을 수 없는 고민에 빠지곤 한다.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