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영미] 자사고 폐지하기

입력 2014-07-10 02:20

“동물은 먹지 않지만 바다 고기는 좋아해요. 개는 사랑하지만 가죽구두를 신죠(…)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혀지긴 싫죠.” 제주 아줌마 이효리의 ‘모순’이란 글을 보며 저게 내 마음이다 싶었다. 바꿔 말하면 이런 거다. “학원은 싫지만 ‘인 서울’은 기본이죠.”

학원 가방 메고 밤늦게까지 축 처져 돌아다니는 아이 모습 따윈 정말 보기 싫다. 수면 부족의 아이를 깨우는 건 더 끔찍하다. 내 아이에게는 소설책을 붙들고 뒹구는 게으른 오후가, 매일 아침 푹 잔 뽀송한 얼굴로 일어나는 일상이, 여름밤 엄마 손 잡고 산책할 여유가 언제까지나 허락되길 바란다. 여기엔 조건이 붙는다. 그래도 공부는 잘해야 한다. 알고 있다. 이런 걸 우리는 모순이라 부른다.

나 자신이 모순덩어리 대한민국 부모여서겠지만, “용기가 없어 두 아이를 주류로 키웠다”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발언에 심하게 공감했다. 두 아이를 외고에 보내고도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그는 분명 ‘모순’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고백한 내면, 치열하게 부딪치는 두 욕망이야말로 많은 학부모들이 조 교육감의 ‘자사고 폐지’ 공약에 고개를 끄덕인 이유다. 대다수 학부모들은 사교육 채찍을 들고는 휘두르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난감한 기분에 빠져 있다. 그들은 대체 아이들이 왜 그처럼 어린 나이부터 비상식적인 분량의 학습에 짓눌려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벗어나라”고 말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나부터가 그렇다.

누구는 “세상에 더 많이 공부하겠다는 걸 법으로 막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고 조롱한다. 만약 학습과 경쟁을 통해 아이들이 정말 똑똑해지는 거라면 이쯤 입을 다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살인적 사교육을 버텨낸 고교 졸업생들이 과거의 학생보다 유능해진 증거는 없다. 생애 푸는 수학문제의 숫자로만 따지자면, 30년 전 학생보다 최소 10배는 탁월해야 마땅한 아이들이 그렇다. 거름망 밑으로 탈락자를 떨어뜨리겠다는 일념으로 조직된 시험과 경쟁 속에서 아이들이 터득한 건 세상의 의자 수가 사람 수보다 적다는 사실뿐이다.

80년 전 이런 고민을 한 사람이 있다. 하루 8시간 일하면 10개의 핀을 만들 수 있다. 10개면 인류가 행복해할 숫자다. 어느 날 두 배 빠른 기계가 나왔다. 인간은 4시간 일해 필요한 10개를 만드는 대신 8시간을 일해 핀을 과잉생산하고, 핀 값은 폭락하고, 공장은 파산하고, 노동자들은 쫓겨나도록 했다. 짧게 일하고 행복한 대신 절반이 과로하고 절반은 실직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게으름에 대한 찬양’). 탈락자 절반은 8시간 대신 12시간 과로할 심적 준비를 마치고 경쟁의 장에 뛰어든다.

어디에 가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더 괴롭고 더 힘들기 위해 다투는 것. 어떤 경쟁이란 그런 거다. 지금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라톤 출발선에서 한 선수가 한 발, 그 옆 선수가 두 발, 다시 세 발을 먼저 떼면서 모두 휘슬이 불기도 전에 달리는 이상한 육상경기 같은 게 돼 버렸다. 결국 더 일찍, 더 많이 뛰는 고통을 공유하며 “쟤도 힘든데…” 위안하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게 자사고 탓이라고 말하면 억울한 일이다. 공교육 붕괴는 폐지 반대론자들이 항변하듯, 자사고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언덕 위 눈뭉치를 거대한 눈덩이로 굴려낸 힘이 자사고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MB정부 전까지 특목고는 특별한 아이들이 가는 ‘선택’이었지만, 특목고와 자사고가 함께 했을 때 일반고는 ‘죄다 떨어진 아이들이 모이는 슬럼’이 됐다. 이제는 학원이 싫은 엄마들조차 초등학교 5∼6학년 무렵부터 “내 아이가 일반고에 가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어리석은 일도 이쯤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자사고는 재학생까지만 배려하고 없애나가는 게 맞다. 그건 내가 6·4지방선거 때 투표장에 가면서 품었던 유일한 기대였다.

이영미 종합편집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