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406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진입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일 때 그 땅을 열두 지파에 미리 분배한다.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졌으므로 하나님이 그렇게 지시하신 것이다.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수 13:1)
당시 납달리 지파가 제비 뽑은 북쪽 지역을 '갈릴리'라고 했는데(수 20:7) 이것이 후에 스불론, 아셀, 잇사갈 지파의 땅까지 포함하는 호칭으로 확대되었다. 두로 지역 외의 가나안 땅을 다 점령한 다윗의 왕국은 BC 931년 분열되었고, BC 722년 북왕국이 먼저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본국 자손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남쪽을 ‘사마리아’라 했고, 이방인이 많이 섞여 사는 북쪽은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었다. BC 168년 수리아 왕 안티오쿠스 Ⅳ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설치하고 제사장들과 유아들을 학살할 때 많은 유대인과 레위인들이 갈릴리로 피신하여 그때부터 갈릴리는 울분과 저항의 땅이 되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성전, 그리심 산에는 사마리아인의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수가의 우물에서 아버지의 뜻을 확인한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르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께서는 그곳이 이미 ‘평화의 성읍’이 아니라 죽은 자들로 가득 찬 번제단 ‘아리엘’이 된 것을 확인하셨다. 그는 38년간 자리를 펴고 누워 변명과 불평만 늘어놓고 있던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르신 후 ‘아리엘’의 죽은 자들에게 외치셨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 말씀은 ‘이방의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실현되었다. 제자들과 함께 ‘나인’ 성에 이르렀을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났다.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과부를 보시자, 그 관에 손을 대어 행렬을 멈추게 하고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그러자 죽었던 자가 일어났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그 후 다시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후 가버나움으로 건너갔을 때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달려나와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막 5:23)
예수께서는 잠시 놀라며 그를 바라보셨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전에 한 ‘이방인 백부장’이 ‘내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하여 그의 믿음을 칭찬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회당장’이라는 자가 그와는 반대로 ‘오셔서 손을 얹으사’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낫게 하시는 것을 회당장 야이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막 5:24)
그는 왜 ‘손’을 얹어달라고 했을까? 예수께서 더 따져 묻지 않고 따라간 것은 ‘나인’ 성의 장례 행렬을 멈출 때 관에 손을 댔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혹시 회당장의 말을 통해 뭔가 지시하실 수도 있었다. 즉 아무 말 없이 그와 함께 가신 것도 아버지의 뜻을 묻는 ‘두드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 와서 호소한 사람이 회당장이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뒤를 따랐고 그들을 에워싸며 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예수께서 무리를 돌아보시며 물으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막 5:30)
예수께서는 관에 손을 댔던 기억, 그리고 회당장이 손을 얹어달라고 했던 말을 곱씹으시며 ‘손’에 관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댄 것 같아서 그렇게 물으신 것인데 놀랍게도 한 여인이 떨며 엎드렸다.
“저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자입니다.”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가진 것을 다 허비했는데 효험은 없었고, 병이 더 중해지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인이었다. 인파 속에서 접근을 못 하다가 비집고 들어가 그분의 옷만 손으로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여인은 이미 고침받은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분이 다 듣고서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손’을 통해 전달된 아버지의 메시지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천지를 지은 그분의 ‘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손’의 메시지를 받으며 예수께서는 세상에 보낼 아들에 관한 예표로 주신 이사야서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셨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 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그 말씀 속에 ‘여호와의 뜻’이 나왔고 ‘손’도 나왔다.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손으로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혈루증으로 열두 해를 앓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과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달려나온 사람들이 고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막 5:35)
딸이 죽었으니 이제 선생께서 오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당장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이제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일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등 세 제자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말씀하셨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 5:39)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살아 있어도 죽은 자도 있으나, 하나님의 아들이 일으키실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잠든 자’였던 것이다.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간 예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달리다굼.”(막 5:41)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오는 도중에 만난 여인이 혈루증을 앓은 것은 열두 해였고, 회당장의 딸도 열두 살이었다(막 5:42). 하나님은 이미 열두 해 전부터 그날의 메시지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9) 오셔서 손을 얹어 주소서
입력 2014-07-11 0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