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주변국 간에 무슨 일이 있을 때 한국의 지인들로부터 이메일이나 전화를 자주 받는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일본과의 갈등은 물론 한국 내 주요한 사건이 있을 때도 미국의 반응이 어떤지를 묻는다. 어떤 사안에 대한 미국 백악관이나 국무부 반응을 살피는 건 워싱턴 특파원의 주요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 국무부가 한·일 간 크고 작은 다툼에 일일이 논평하지 않는다’ ‘북한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설명해도 상대방이 그리 명쾌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다. 기자가 받는 느낌은 이렇다. ‘일반 국민은 물론 관리와 학자들도 미국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게 습관화돼 있구나.’ 남북문제는 물론 주변국과 외교에서도 미국의 시각은 여전히 한국인에게 주요한 잣대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을 이젠 바꿔야 할 것 같다. 최근 워싱턴DC 미 평화연구소에서 열린 남북문제 세미나에 참석한 통일연구원의 한 박사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강연자로 참석한 미국 당국자들이 이제 한반도 통일과 북한 문제 해결에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며 미국은 이를 지원할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0년 넘게 매년 미국 싱크탱크 관계자와 당국자들을 만나왔다는 그는 미 정부 당국자가 남북문제와 관련, 이처럼 ‘약한’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미국 정부가 이런 방침을 정한 것은 최소한 1년은 넘어 보인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2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 중앙정보국(CIA)이 ‘한반도 문제는 한국이 주도해야 하며, 북한 핵 문제는 중국을 압박해 해결토록 해야 한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냈다고 한다. 최근 미국 정부의 행보를 보면 이 보고서의 권고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특파원과 가끔 모임을 갖는 글린 데이비스 미국 6자 회담 수석대표의 언행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감지된다. 우다웨이 중국 대표의 ‘우선 대화 재개’ 압박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 한국 측 6자 회담 대표를 만난 뒤 입장을 정리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한반도 문제뿐 아니다. 미국은 대(對)중국 관계 등 동북아 현안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꺼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미국의 시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과 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는 일본 정부의 행보는 미국의 이러한 속내를 꿰뚫어 본 결과라는 분석이 있다.
워싱턴의 일본 소식통에 따르면 아베 신조 총리가 미국과 엇박자를 내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계기는 지난해 12월 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선포라고 한다. 미국이 말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중국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데 크게 실망했고, 보다 독자적인 외교 노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변화는 국방예산 감축 등 재정난과 관련이 깊겠지만 ‘의지’ 부족도 한 요인으로 보인다. 화약고로 변한 중동 등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평안한 동북아 문제까지 개입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남북문제는 물론 동북아 현안에서도 ‘잣대’가 돼 온 미국의 태도 변화는 단기적으로 역내 정세에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와 동북아 현안에 한국 정부의 시각과 해법이 힘을 얻게 됐다는 점에서는 기회다.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우리가 얼마나 외교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서는 한국에 유리한 한반도 통일의 여건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조성될 수 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
[특파원 코너-배병우] 정말 예전 같지 않은 미국
입력 2014-07-09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