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말

입력 2014-07-09 02:20

만약 당신에게 한국의 오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을 들라고 하면 얼른 무엇을 말할까. ‘한국의 오늘’이라는 ‘질문법’이 너무 거창한가? 나는 얼른 ‘말’이라고 하고 싶다. 요즘의 말, 우선 너무 불명확하다. 거칠다. 말의 앞뿌리와 뒤뿌리가 없이 짧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말의 미덕인 존댓말이 없다.

첫째, 말의 불명확함을 든 이유. 뉴스의 앵커는 말한다. “다리가 부서졌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멘트는 “시민들은 많은 불편을 겪었습니다”이다. ‘불편함’이란 편하지 못한 기분을 느꼈다는 정도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앞의 말은 ‘다리가 부서졌다’이다. 이것이 ‘불편한’ 정도인가.

계산대 앞에 서면 카운터로부터 들려오는 요즘의 말이 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구입한 물건의 값을 계산하는데, 종업원이 무엇을 도와준다는 것인지, 돈을 내주겠다는 것인지, 물건을 카운터로 들어 올려주겠다는 것인지. 성폭력과 성추행, 상당히 헷갈린다. ‘∼ 같아요’라는 표현도 요즘 말의 트렌드이리라. 불명확한 시대에 ‘나’라는 존재의 불명확함이 일조한 건 아닐는지.

둘째, 너무 거칢을 든 이유. 예를 들어 ‘죽여줘’라든가 ‘죽여버릴래’, ‘물폭탄’ 등. ‘죽여줘’는 ‘극심하게’라는 부사적인 뜻을 살해의 뜻과 동일시하는 현상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 ‘죽여버릴래’도 마찬가지이다. 말의 극단화가 일어난다. 여기엔 ‘ㅅ’의 사용이 점점 느는 것도 한몫하리라. 말의 경화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우유값은 우윳값이라고 발음한다든가 소주를 소주라고 하면 재미없어지는 식, ‘쐬주’라고 해야 재미있을 뿐 아니라 그 사물의 모습을 정직히 표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많은 정치 톡 쇼들을 보면 전문가들로부터 시작되는 말의 변화를 새삼 느낀다. 전문성을 드러내면서도 국적불명이기 쉬운 외국어와 한국어의 조합.

셋째, 너무 짧음을 든 이유. ‘단군 이래 거의 전 인구가 작문하게 된’ 이 시대, 스마트폰 문자메시지의 말의 파괴가 대표적인 것이리라. 문자메시지는 곧 우리의 말에서 동사도 명사도 없이 이모티콘만 남게 할지 모른다. 트위터는 그런 이행의 중간적 모습이 아닐는지. 평등감각에도 맞지 않는 존댓말의 삭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면 이것들의 밑바닥에 있는 근본적인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의 부재? 그중에서도 시의 부재? 아, 지금 나의 말도, 방금 내 딸에게 전화한, 시인인 나의 말도 그런가.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