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명 댄’으로 불리던 1960년대 악명 높았던 스파이의 정체가 미국 국가안보국(NSA) 요원 로버트 립카로 밝혀졌다. 립카는 2만7000달러를 받고 소련에 기밀정보를 넘긴 혐의로 체포돼 징역 18년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영국이 ‘미트로킨 파일’에 담긴 그의 정체를 미국에 알려준 덕분이었다.
주요 외신들은 7일(현지시간)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처칠아카이브센터에 보관돼온 구(舊)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첩보기밀이 담긴 미트로킨 파일 원문이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1999년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 지 22년 만에 2000쪽 분량 전문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KGB의 해외기밀 기록보관 담당자였던 바실리 미트로킨이 작성한 이 자료는 냉전시대를 풍미했던 KGB의 각종 첩보활동을 총망라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밀유출’로 평가받고 있다.
미트로킨과 미트로킨 파일의 존재는 1999년 크리스토퍼 앤드루 케임브리지대 역사학과 교수가 미트로킨의 자료를 토대로 책을 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멜리타 노우드라는 영국의 평범한 87세 할머니가 사실은 KGB에 포섭돼 40여년간 영국의 원자폭탄 관련 기밀을 소련에 넘겨온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큰 파문이 일었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활동한 KGB 요원 약 1000명의 명단이 새로 공개돼 논란이 예상된다.
서방뿐 아니라 공산권 내 KGB의 첩보활동상도 기록돼 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때 반체제 인사들 사이에서 암약한 KGB 요원들의 정체와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된 카롤 보이틀라 폴란드 대주교에 대해 ‘극도로 반사회주의적인 관점’을 지녔다며 집중 감시한 내용 등이 눈길을 끈다. 케임브리지대 출신 5인조 스파이 그룹으로 널리 알려진 가이 버지스 등 유명 스파이에 관한 KGB의 평가도 담겼다.
미트로킨이 자료를 작성하고 망명하는 과정 자체가 한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KGB 소속이었지만 공산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꼈던 그는 1972년부터 첩보 자료를 몰래 집에 가져가 손으로 베껴 쓴 뒤 타자로 쳐서 책으로 묶었다. 완성된 책에는 ‘저주받은 체제’ ‘쥐덫’과 같은 제목을 달았는데 1984년까지 12년간 작성한 책은 상자 19개 분량에 달했다. 그는 시골집의 우유통에 자료를 넣어 땅에 묻는 방식으로 KGB의 삼엄한 감시를 피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이듬해 미트로킨은 라트비아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지만 정보요원이 아닌 사서라는 이유로 망명을 거절당한다. 뒤이어 찾아간 영국 대사관은 “차 한잔 하자”며 친절히 맞았고 미트로킨은 자신이 지닌 방대한 자료와 함께 영국으로 향했다. 가명을 쓰고 경찰의 보호 속에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 2004년 81세로 사망했다.
십수년간 자료를 연구하고, 두 권의 책을 미트로킨과 공동 출간한 앤드루 교수는 AP통신에 “이 방대한 자료는 영·미 정보 당국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밀자료”라고 말했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
소련 첩보조직 KGB 적나라한 활동상 공개
입력 2014-07-08 0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