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무력 도발이나 북핵 문제 등으로 한반도 긴장 상황이 이어질 때마다 남한에 세계 스포츠 대회 응원단을 파견했다. 최근 남북관계도 북한의 핵무력·경제건설 병진 노선 고수, 잇단 미사일 발사, 드레스덴 선언 비난 등으로 꽉 막혀 있다. 북한의 인천아시안게임 응원단 파견 카드는 남한과 중국 중심의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가져오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남북체육교류협회 김경성 이사장은 7일 “응원단은 외모·사상을 기준으로 선발된 20대 초중반 여성들로 구성되며 규모는 100여명 수준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북측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291명을 보낸 점을 감안하면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다.
◇남북 경색 국면마다 응원단 파견=북한은 지금까지 남한에 세 번 응원단을 보냈다. 처음 응원단을 파견한 것은 2002년 9월에 열린 부산아시안게임 때다. 당시 한반도는 불과 두 달여 전인 6월 29일에 발생한 서해교전으로 군사적 긴장 상황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북한 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발생한 서해교전으로 우리 해군 6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큰 인명 피해와 함께 김대중정부의 퍼주기 논란이 이어지면서 대북 강경 대응론에 힘이 실리던 때였다. 북한은 서해교전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같은 해 8월 초 이례적으로 제7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위한 금강산 실무접촉을 갖자고 제의했고, 부산아시안게임 참가 및 응원단 파견을 제안했다.
2003년 8월에 열렸던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때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전해인 2002년 12월 12일 핵 동결 해제 및 핵 시설 재가동 발표로 한반도를 핵 위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이듬해 여름까지 핵 문제로 공방이 이어졌다. 결국 북한은 7월 열린 제11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북한 팀 및 응원단 참가 카드를 함께 꺼내들었다.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 2005년 8월도 북핵 문제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였다. 북한은 그해 2월 10일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고, 3개월 후인 5월 11일 영변 5㎿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000개를 인출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국제적으로 대북 제재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북한은 느닷없이 8월 비교적 소규모 국제 대회인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내려 보냈다. 이후 북한은 9월 19일 6자회담을 통해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 계획 포기’ 등 6개항의 9·19공동성명 채택에 합의했다.
◇숱한 화제 속 남남갈등 유발=북한이 남한에 세 차례 파견한 응원단은 큰 관심을 끌었다. 특히 매번 모두 미모의 젊은 여성이 다수 포함돼 ‘미녀 응원단’으로 불리며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빼어난 외모의 젊은 여성 예술인들이 다수 포함된 북한 응원단은 흰색 모자와 붉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경기장에 나타나 관중의 시선을 끌었다. 북한은 이듬해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에도 대학생이 주축인 303명의 응원단을 파견했다. 이들 역시 미녀 응원단으로 통하며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북한이 응원단을 파견하면서 남한 관중이 이들의 응원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경기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남북 화해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응원단을 두고 남남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산아시안게임에선 북한의 인공기 게양 여부를 놓고 남한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진 끝에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인공기가 남한 땅에 걸렸다.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때는 보수단체가 인공기를 소각했고,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에 유감을 표명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진이 인쇄된 현수막이 비에 젖은 것을 본 응원단이 눈물을 흘리며 “장군님 사진을 이런 곳에 둘 수 있느냐”고 항의해 우리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응원단을 파견한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부인인 이설주가 당시 예능 인재 양성 기관인 금성학원 학생으로 응원단에 포함돼 남한 땅을 밟은 게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됐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北 “亞게임 응원단 파견”] 북한 속셈은?
입력 2014-07-08 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