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순애 (3) 초교 3년 중퇴… 나를 키운 건 성경필사와 독서

입력 2014-07-09 03:13
예텃골에 살던 박순애 전도사의 젊은 시절 모습.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면 그는 온종일 동네 품팔이로 불려다녔다.

예텃골에서의 삶은 훈련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다. 훗날 내가 받을 복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세 가지 그릇을 준비했다. 기도와 수고, 결단. 이것이 준비된 자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한때는 나도 ‘무늬만 성도’였다. 그런데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게 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주님을 믿어선 결코 복 받을 수 없다. 목숨을 바치듯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비로소 주님을 만난 건 열아홉 살 때다. 아직도 그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성령님은 평범한 예배 중에 감동으로 오셨다. 눈물 콧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입에선 알 수 없는 방언까지 터졌다. 처음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뼛속 깊은 곳의 ‘나’까지 다 토해냈다.

나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질렀던가. 어머니와 내게 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 어린 나를 무참히 짓밟은 그 악마를 수백번, 아니 수천번씩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런데 주님은 내 속을 단단히 해부하셨다. 그 상처들을 모두 파버리셨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1주일 동안 눈물의 무릎 기도를 드린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앞에선 숨 쉬는 것조차 무서웠기에 ‘아버지’를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의 영혼을 바라보게 됐고 그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게 아닌가.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관계 회복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까지 허락해주셨다. 삶의 끝자락에 놓인 아버지에게 나는 주님을 전했고 아버지는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19세 박순애는 이때부터 예배의 성공자가 되겠다고 결단했다. 인생의 성공은 부귀영화가 아니다. 예배의 성공이다. 즉 거듭남이다. 영적 체험 없이는 거듭날 수 없다. 믿음과 삶은 거듭난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늘나라 특권이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진짜 신앙인인지, 가짜인지는 믿음과 삶으로 드러난다.

나는 새벽마다 2시간을 걸었다. 그렇게 읍내의 한 개척교회에 나가 새벽예배를 드렸다. 집에서 교회까지 오가는 길 왕복 4시간. 새벽예배 30분. 가끔은 산길이 무서워 시편 23편을 큰 소리로 읽고, 목청껏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나의 길을 훤히 밝혀줬다. 교회로 가는 길은 그래서 두렵거나 떨리지 않았다. 27세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매일 그 길을 걸었다. 비록 내가 처한 환경은 처절했지만 ‘무릎 기도’는 내 가슴에 꿈을 심어줬다.

주님과 교제를 하면 할수록 내게는 한 가지씩 꿈이 늘어갔다. 그 첫 번째가 성경통독. 구룡포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채 마치지 못한 나는 글을 완벽하게 읽고 쓰지 못했다. 성경을 읽으려면 한글을 떼는 게 필수였다. 간절하게 내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드렸다. 성경을 읽고 싶다고 기도했다. 성령님이 내게 주신 감동은 “성경을 쓰라”는 거였다. 창세기 1장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읍내에 걸린 간판들을 줄줄줄 읽어나갔다. 22세 가을에 성경 통독을 했고, 성경 필사도 마쳤다.

그때부터 무엇이든 다 읽었다. 오죽했으면 휴지 대신 걸려 있는 헌책들을 훔쳐다 읽기까지 했을까. 온 동네 품팔이로 일하러 다니면 책 한두 권씩 빌려와 밤새 읽고 중요한 내용들을 노트에 적었다. 시집을 정독했다. 한국문학전집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셰익스피어 작품들, 간디 자서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레미제라블, 몽테뉴의 수상록…. 노트에 요점을 기록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책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만났다. 책은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배움에 굶주렸던 나에게 책은 학교였다. 예텃골이라는 깊은 산골에서 그야말로 가슴 떨리게 책을 읽었다. 지금도 책을 읽으며 노트에 정리한다. 그렇게 모아진 노트가 800권에 달한다. 오늘날 내 인생의 아름다운 자양분이 됐다. 내 수고의 땀방울을 주님은 잊지 않으셨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