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순애 (2) 한번의 죽음과 회생, 그리고 엄마와의 재회·이별

입력 2014-07-08 02:58
어린시절을 추억할 만한 사진이 박순애 전도사에겐 없다. 청송에서 농촌계몽운동인 ‘4-H’ 회원으로 활동하던 19세 때 찍은 사진

나는 구룡포에서 만난 교회학교 선생님에게서 전도자의 자세를 배웠다. 전도자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 영의 눈으로 사람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전도가 된다. 그런데 요즘 전도하기 참 힘들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이 귀한 일을 포기할 것인가.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데 말이다. 전도만이 생명을 부여받는 길이다. 그래서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10세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삶의 의욕을 꺾을 수밖에 없던 내가 다시 생명을 얻게 된 것도 교회학교 선생님의 전도 때문이다. 그분은 내게 사랑을 주셨다. 그게 전도다. 얼굴이며 손발이 온통 시커멓고 더러운 아이가 선생님의 사랑으로 찌든 때를 벗겨냈듯, 내 안에도 한줄기 빛이 찾아온 거다. 사랑의 힘이다. 사랑을 주면 전도가 된다.

그런 내가 13세 때 구룡포를 떠났다. 계기가 있었다. 버려진 인생의 고통을 초월하는 더 큰 고통이 온 것이다. 성폭행. 한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나란 존재는 살기 위해 태어난 거 같지 않았다. 난 버려졌고 외톨이인데 나 하나 죽는다고, 폭행을 당한다고 누가 상관이나 하겠는가. 이미 버려진 삶 그 자체인데 말이다. 어린 나이에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구룡포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바다에 몸을 맡겼다. “엄마, 엄마, 엄마….” 어느 순간 음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말려 들어간 것이다. 바다는 그렇게 나를 삼켰다.

비록 버려진 아이였지만, 누군가의 사랑 때문에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짧은 시간이었다. 무참히 그런 시간들조차 짓밟히고 나니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었던 거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떴다. 처음엔 죽음 이후의 세상인 줄 알았다. 해는 중천에 떠있고, 맑은 하늘이 나를 감싸 안았다. 어젯밤 분명 바다는 나를 삼켰는데, 지금 이렇게 살아난 것이다. 하늘을 보며 따지듯 외쳤다. “하나님, 왜 나를 살리셨나요? 나란 존재는 죽어야 하는데….”

가슴을 울리는 음성, 그건 선생님이 가르쳐준 기도였다. “순애야, 하나님께 기도하면 네 소원은 꼭 이뤄진단다. 엄마를 만나고 싶으면 하나님께 꼭 기도해.”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건 어머니를 찾으란 뜻인가? 구룡포를 벗어나 엄마를 찾아 나섰다.

경북 청송에서도 깊은 산골. 마을 이름은 황골이다. 내 어머니의 고향이다. 몇 고개를 넘어 겨우 찾아간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다. 마치 꿈만 같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내 발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걷고 또 걸어서 그리 된 발이었다. 그런 발을 하고 어머니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날 나는 밤새도록 어머니 팔베개를 하고 말했다.

“엄마, 다시는 나 버리면 안 돼. 어디 안 가고 내 옆에 있을 거지?” 불안에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황골 마을에서 두 달을 살고 또다시 어머니와 헤어졌다. 안동의 부잣집 식모로 보내졌다. 거기에서 일만 잘하면 학교를 보내주고 배불리 쌀밥도 먹여준다는 말에 어머니는 더 좋은 세상을 보라며 나를 식모로 보낸 것이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만 했다. 따뜻한 밥은 먹어본 적도 없다. 밤마다 성경책을 꼭 끌어안고 골방에 누워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며 눈물로 기도했다.

어린 식모는 3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16세 추운 겨울,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골에서 조금 떨어진 예텃골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렸다. 이곳은 축복과 기적의 땅이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흙집에 겨우 몸을 의지하는 정도였지만 어머니와 나, 둘이기에 행복했다. 예텃골 이전의 삶은 절망뿐이었다. 그저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 안에 주님이 온 순간, 같은 세상이어도 성령의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꿈꾸는 자로 변했다. 17세부터 다시 교회를 나갔고, 19세에 성령체험을 한 뒤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절대희망의 삶을 살았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