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용서받은 자의 의무

입력 2014-07-07 02:32

오늘 본문은 용서의 한계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초대교회 당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규정을 따르는 냉정한 치리가 우선인지, 아니면 끝까지 용서하고 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상대를 사랑으로 포용하고 용서하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용서의 조건을 따지지 말고, 문자 그대로 용서하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용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비유 속의 관원은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는 물론 심지어 그의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모두 팔아야만 할 정도로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었습니다(25절). 1만 달란트는 요즘 화폐 가치로 따지면 대략 100억원 정도 됩니다. 그 관원이 갚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액수였습니다. 부채를 갚는 건 오직 왕의 ‘불쌍히 여김’을 통해서만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엄청난 부채를 탕감 받은 관리는 자신의 동료에게 빌려 주었던 극히 소액의 돈조차 탕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말씀의 초점인데, 그 관리는 왕의 관대함을 본받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눅 7:41∼43). 신명기 15장에도 이웃에 대한 빚 탕감 시행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 주었다(15절)는 사실, 즉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고 탕감해 주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우리의 형제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신명기 15장에는 형제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제’란 1차적으로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혹은 비난받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통념의 경계를 뛰어넘어 인도주의적 책임 차원에서 확대해야 할 주변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라면 우리 주변의 소외되고 가난한 자, 외국인 노동자 등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이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거듭난 눈’입니다.

그리고 용서(또는 빚 탕감)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본문 35절의 결론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과 같은 동일한 은혜를 이웃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결국 우리에게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용서에 대한 명령은 하나님의 은혜·용서와 관련된 ‘서술문(indicative)’이면서 동시에 ‘명령문(imperative)’입니다. 예수님은 이 서술문과 명령문이 우리 삶 속에서 상호 긴장관계 속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개인적 신앙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나의 손과 발에 이웃을 향한 ‘수고의 땀과 흙’이 묻어 있는지, 아니면 이웃을 억울하게 만든 그들의 ‘피와 눈물’이 묻어 있는지 결산으로 완성됩니다. 오늘날처럼 양극화가 심화되고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넘는 공동체 붕괴의 위기적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에 대한 구체적인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탕감 받은 나’는 과연 ‘탕감하는 자’입니까.

정종성 목사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