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돈에 담긴 철학

입력 2014-07-07 02:17

밥값 집값 옷값처럼 우리가 주고받는 돈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데, 다 그런 건 아니다. 얼마를 줄 것인지, 얼마나 받을 것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돈이 몇 가지 있다. 이런 돈은 그 사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보여준다. 철학이 담겨 있는 돈, 대표적인 게 대학 등록금이다.

미국 대학의 등록금은 1년에 수천만원씩 하지만 독일 대학은 공짜에 가깝다. 이 차이는 ‘대학 교육을 왜 하는지’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개인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대학에 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선택이기에 그 비용을 시장이 결정하도록 맡겨뒀다. 반면 독일은 국가가 유지되려면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해서 대학이 있는 거라고 여긴다. 그러니 그 비용도 당연히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대학 교육에 드는 비용은 미국이나 독일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등록금 액수가 이렇게 다른 건 그 돈에 정반대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상인들이 아우성치고 있는 상가권리금도 결국 철학의 문제다. 상가건물에는 건물의 소유주와 그에게 점포를 빌려 장사하는 상인들이 있다. A가 가진 건물에 상인 B가 아주 맛있는 설렁탕집을 차려서 입소문이 나면 그 건물을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러면 그 건물에서 장사하려는 사람이 몰리고 건물의 값어치는 덩달아 높아진다. 이렇게 창출된 가치는 누구의 몫일까.

영국은 상인 B의 노력이 건물 가치를 일정 부분 높여줬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건물주 A가 상인 B에게 ‘보상’을 하도록 법으로 정해뒀다. 점포마다 건물주가 임차상인을 내보낼 때 얼마를 보상해야 하는지 액수까지 명시해둔다. 한국 임차상인들이 툭하면 권리금 날리고 쫓겨나는 건 상인의 노력으로 건물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을 우리 사회가 그동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봄 박근혜 대통령의 상가권리금 법제화 선언으로 이제 권리금이란 돈에 철학을 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계산 대신 생각이 필요한 돈이 한국사회에 또 하나 등장했다. ‘생활임금’은 근로자가 최소한의 인간적, 문화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급하는 임금을 뜻한다. 1994년 미국 볼티모어시가 처음 생활임금 조례를 만들었다. 시에 직접 고용된 근로자, 시와 계약을 맺은 민간업체 근로자에게 최저임금보다 30% 정도 많은 임금을 주도록 의무화했다. 이후 미국의 주요 도시와 영국 호주 등지로 확산됐다. 이름은 최저임금인데 현실에선 저소득층의 ‘최고임금’이 돼 버리는 한계를 지방자치단체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에서만큼은 극복하자는 게 생활임금에 담긴 철학이다.

우리나라에선 2013년 경기도 부천시가 처음 이 조례를 제정했다. 서울 성북구 노원구 등에서도 시행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6·4지방선거에서 생활임금 도입을 공약했다. 세월호 참사에 묻혀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최근 경기도의회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다. 지난달 26일 경기도의회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생활임금 조례를 통과시켰다. 지난해 통과됐다가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반대로 무산된 걸 다시 의결했다. 이제 공은 남경필 지사에게 넘어갔다.

부천시 등의 올 생활임금은 월 143만원 정도다. 최저임금(월 109만원)보다 34만원쯤 많다. 근로자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에 대한 생각 차이는 ‘34만원’만큼 벌어져 있다. 계산기 두드려선 이 간극을 메울 수 없다. 우선순위의 문제다. 야당과의 연정 실험에 나선 남 지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태원준 사회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