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총회장 이신웅 목사) 신임 총무 김진호(64) 목사에게는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 김 목사의 할머니와 누나 둘은 6·25전쟁 중에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된 1950년 9월 27∼28일 무렵이었다. 충남 논산 병촌성결교회에 들이닥친 좌익단원들이 교회 성도 66명을 뒷산으로 끌고 갔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누구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들은 66명 전부를 묶은 채 우물에 빠뜨리거나 죽창과 삽 등으로 공격해 잔인하게 살해했다. 김 목사의 할머니와 누나 둘도 이때 희생됐다. 소방대원이었던 아버지도 이 즈음 좌익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김 목사와 어머니, 큰누나, 형만 겨우 살아남았다. 좌익들이 김 목사 등 남은 가족도 모두 죽이려고 집으로 찾아왔지만 30분 먼저 몸을 피한 덕에 목숨을 건졌다.
김 목사는 6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를 중3 때 듣고 ‘하나님이 살려주신 목숨,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며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중3 때부터 고3 때까지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비가 억수로 와서 성도들이 오지 못한 날에도 담임목사와 단둘이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빚보증을 섰다 잘못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부여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영천시장에서 배추장사를 했다. 장사가 잘돼 9개월 만에 등록금 이상을 벌었지만 그해 가을 시름시름 앓으면서 병원비로 다 날렸다. 다시 1년간 한남동의 집 짓는 공사장에서 일해 1971년 서울신학대에 입학했다. 문제는 졸업할 때까지의 등록금이었다.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플라스틱 용기에 직접 글씨를 인쇄하는 ‘실크 인쇄’ 사업을 시작했는데 대박이 났다. 독점에 가까웠던 데다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당시 16명의 직원을 두고 밤새 공장을 가동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사업을 해 1년여 만에 집 2채를 서울에 마련했다. 그러나 형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집을 팔아 치료비에 보탰다.
김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도 탁월한 사업 능력을 보였다. 그는 평생 교회를 3곳 건축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대전에서만 교회 2곳을 건축했다. 이 무렵 전남 영암제일교회에서 청빙이 왔는데, 교회 건축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 여겨 그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교회 빚만 3억원이 넘었다. 빚을 갚기 위해 2008년 요양보호사 교육시설을 개설했는데, 대성공이었다. 그해 노인요양보호제도가 도입돼 1년 남짓한 기간에 요양보호사 600여명을 배출했다. 전남지역 우수교육기관으로 선정됐고, 이때 벌어들인 수입은 교회 빚을 모두 갚고도 남았다.
김 목사는 교단 규정에 따라 지난 5월28일 제 108년차 총회에서 총무로 당선된 뒤 영암제일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했다. 그는 “미련은 없다”며 “하나님께서 총무로 이끄시니 순종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총무 선거에 나선 것은 전 총회장들의 권고 때문이었다. 5명의 전 총회장들이 “평소 지켜봤는데 적임자”라며 헌신을 부탁했다. 김 목사는 교단 해외장학회장, 영암기독교연합회장, 캄보디아선교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선거운동은 힘들었지만 얻은 게 더 많았다. 김 목사는 “선거운동 기간인 15일 동안 전국을 2번 돌았는데, 지방회가 같은 날 열려 서울 대전 울산 진해 전주 수원을 하루에 다녀온 적도 있다”면서 “하지만 우리 교단을 사랑하는 분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정치에 앞장서는 정치꾼이 아닌 이분들을 잘 섬기는 살림꾼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기성 신임 총무 김진호 목사 “정치하는 정치꾼 아닌 교단 섬기는 살림꾼 될 것”
입력 2014-07-07 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