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순애 (1) 절대절망에서 나를 다시 세운 구룡포교회 종소리

입력 2014-07-07 02:35
지난 2월 서울 관악구 월드비전교회에서 부흥성회를 인도하고 있는 박순애 전도사.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믿는 자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둘 중 하나이다. 생명과 복이냐, 사망과 화냐. 그리스도인은 분명 생명을 택해야 한다. 생명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건, 바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축복은 자연 따라온다. ‘역경의 열매’ 연재를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본질에 충실하자.” 나 같은 사람도 본질에 충실했더니 이렇게 됐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나는 1963년 경북 포항의 구룡포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에서부터 세 남매는 아버지의 전처소생이고, 어머니는 오빠 둘에 나를 낳았다. 곱디고운 내 어머니는 불쌍한 여인이었다. 16세에 시집간 어머니는 결혼 일주일 만에 남편이 일제에 강제 징용되자 생사를 모른 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20대 후반, 아홉 살 많은 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재혼했다. 아버지는 전처와 사별하고 세 남매를 홀로 어렵게 키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기잡이배를 탔다. 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지만 가족간 정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탔던 배에서 불이 나고 말았다. 바다 한가운데서 화로가 엎어져 25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유일하게 아버지만 살아남았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배를 타지 못했다.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했다. 불안과 공포심을 털어내지 못해 늘 안절부절못했다. 급기야 불같이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고 알코올 중독에 폭력까지 일삼았다. 날로 심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에 오빠, 언니들은 모두 집을 나갔다. 당시 여섯 살 내 눈에 비친 어머니는 늘 울고 계셨다. “순애야, 순애야, 이 불쌍한 것을 어쩌누.”

초등학생이 되어도 아버지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인 아버지를 피해 학교를 갔지만, 그곳에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육성회비는 늘 밀렸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 빵 나눠주는 시간만 되면 홀로 운동장에 나와 설움만 삼켰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아 늘 멍투성이인데,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집엔 돈이 없었다.

그렇게 참고 인내하던 어머니가 나만 남겨두고 구룡포를 떠난 것이다. 내 나이 열 살 때, 난 그렇게 버림받았다. 엄마라는 둥지를 잃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학교도 집에도 갈 수 없었다. 배가 고팠다. 쓰레기통을 뒤졌다. 깡통을 들고 구걸했다.

그런데 그걸 아는가. 절대절망은 절대희망의 시작이란 것을. “뎅그렁, 뎅그렁.”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찾아간 구룡포교회에서 난생 처음 예배란 걸 드렸다. 밥도 얻어먹었다. 그때부터 교회만 찾아갔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 교회 같았다. 또래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이들은 “선생님, 얘네 엄마 도망갔어요” “얘네 아빠 정신병자예요” “얘는 길에서 더러운 거 주워 먹고 다녀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교회 문을 나섰다. “엄마,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내 삶에 찾아온 천사, 교회학교 선생님이다. “순애야, 친구들은 너를 싫어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너 같은 아이들을 더 사랑하셔. 하나님, 이 불쌍한 아이를 버리지 마소서.” 거지꼴을 한 나를 선생님은 꼭 안고 기도해주셨다. 아직까지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셨다. 그 선생님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약력=1963년 경북 포항 출생, 구룡포초 중퇴, 예장통합 서울북노회 성서신학원 졸업, 벧엘종합학원원장·오륜교회 전도사 역임, 현 분당제일교회 전도사, 의정부교도소 정신교육 강사 및 교정위원, ㈔국제사랑재단 홍보대사, 찔레꽃예향선교회 대표, 저서로는 ‘찔레꽃 그 여자’ ‘절대희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