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도선교회 섬선교 봉사단원 누군가 맹골수도 바닷가에 앉아 말했다. 해조류 톳을 거두는 작업을 하다 꿀맛 같은 휴식을 가지면서였다.
“저 건너편 섬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7∼8명의 단원 중 누가 받아쳤다.
“물 위를 걸어가. 예수 그렇게 (오랜 세월) 믿고도 그거 못해?”
모두 ‘와아’ 하며 웃었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거뒀다. 바다안개가 먹구름처럼 그들 머릿속에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침몰된 그 바다였다. 11명의 실종자가 아직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맹골수도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불쑥 자란 해당화만 바다안개에서 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실종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 뭍으로 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진도 팽목항에서 20여㎞ 떨어진 섬 관사도. 늦장마 탓에 연일 바다안개가 끼어 결항이 잦은 날이 계속됐다. 낙도선교회(대표 박원희 목사) 제56차 단기선교팀이 이 섬에 도착한 것은 29일이었다. 80여명이 진도코스와 완도코스로 40여명씩 나뉘어 1주일간 선교에 나섰다. 진도코스 B팀은 관사도침례교회에 둥지를 틀었다. 관사 마을이었다. 이 마을 반대편 관작마을엔 A팀이 들어가 그곳 마을회관에서 숙식을 하기로 했다.
“중심의 모순이 세월호 아이들을 잡아”
관사도는 여의도 반(1.62㎢) 넓이다. 비교적 평지인 관사·관작 마을은 5년 전만 해도 마을을 오가는 도로가 없었다. 산을 넘거나 배로 오가야 했다. 이 섬엔 1960∼70년대만 해도 관사초교 학생 수가 600여명이었다. 지금은 관사분교가 되었고 3명이 학생의 전부다. 주민은 40여명. 그마저도 80%가 80세 넘는 고령이다. 관사도뿐 아니라 우리나라 먼 바다의 섬 사정이 대개 이렇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만난 낙도선교회 박 목사의 얘기가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초기 크리스천은 민족이 불운할 때 예수 정신의 씨를 뿌려 민족 속에 교회가 있게 했어요. 70, 80년대에도 크리스천은 정치·사회적 고난을 감당했고요. 이는 땅 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죠. 그런데 지금은 땅끝이 아닌 중심에서 세상을 바라보죠. 신학생들조차도요. 중심의 모순으로 뭉쳐진 암덩어리가 (세월호 탑승) 아이들을 잡았어요. 그로 인한 고난은 변방의 사람들이 감당하고 있고요. 곱게 자란 권력자 아들이 (우리 국민은) ‘미개인’이라고 했나요? 중심의 권력자들은 그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처럼 ‘참 안됐군요’하고 말아요. 땅 끝에서 보려고 하지 않죠.”
그 땅 끝은 지정학적 의미만은 아니다. 예수 시대에 문둥병자, 소경, 불구자, 앉은뱅이, 혈루병자, 귀신들린 자, 과부, 고아, 포로 등 소외된 이들은 지금도 땅 끝에 있다. 예수가 태어난 나사렛도 땅 끝이었다. 박 목사가 그 땅 끝 사람들을 위해 모은 단기선교팀 80여명은 ‘무서운 바다’를 마다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세월호 참사 발생 두 달 반. 매년 진행하던 낙도선교회 단기선교팀 신청자는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해약자가 속출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교회 신청자가 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하고 박 목사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교회 측 사정이 이해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끝에 “(신청했다가) 사고라도 나면 (신청 교회) 목사의 리더십에 흠이 생길 수 있거든요”라고 아쉬워했다. 어찌됐든 우리 80여명은 기도회 후 땅 끝으로 향했다.
관사도엔 구릿빛 얼굴의 김요셉(48) 목사가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해당화와 수국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폐그물과 폐자재 등이 해안가에 나뒹굴었고, 빈집엔 잡초가 키높이까지 자랐다. 따가운 햇살 아래 술주정꾼이 술병을 들고 느릿느릿 걸었다.
‘맹골수도’ 섬 관사도 소금기 먹은 교회
관사도교회당은 십자가가 없다. 교회 문 앞까지 바람에 쓸려온 모래가 쌓였고 떨어진 교회 지붕은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교회 옆쪽 해안은 마을 쓰레기장이 차지하고 있다.
“2012년 태풍에 교회 예배당이 물에 잠겼어요. 십자가가 꺾여 지붕을 덮쳤고, 교회 뒤 노송도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역시 예배당 지붕 위로 쓰러졌죠. 간신히 응급 복구했지만 비 새는 걸 잡지 못했어요. 십자가 탑은 보시다시피 세우다 중단했고요.”
김 목사는 블록벽돌을 쌓아 십자가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면사무소 측은 교회 건물 자체가 불법건축물이니 공사를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이번 선교팀이 십자가 탑 마무리 공사를 해주려 했으나 헛된 일이 되고 말았다.
관사도에 교회가 들어선 것은 1970년대 미국 침례교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마을 쓰레기장을 메워 세운 예배처소였다. 무허가 건축물이 된 이유다. 이 처소는 순회선교사에 의한 기도처가 되기도 했고, 전도사가 들어와 머물 때면 제대로 된 예배가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렵만 하더라도 무속이 워낙 강해 복음 전파가 어려웠다.
김 목사 부임 후에도 예배 중 문앞에서 108배 불공드리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경운기로 교회 가는 길을 막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도 20여명이 출석하는 건 김 목사의 ‘복음 열정’ 때문이다.
관사와 관작 마을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 하지만 관작마을 교인들이 관사마을에 있는 교회에 오려면 꼬박 한 시간이 걸린다. 허리 굽은 노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마을 유일의 자가용인 밴으로 2회 왕복하며 예배 시간에 댄다. 김 목사는 관작마을에 빈 집 하나를 사 놓고 교회 헌당을 기도 중이다.
팽목항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지난달 30일 세월호 참사 대책본부가 있는 팽목항에서 관사도행 배를 탔다. ‘환난의 날에 산성’(나 1:7) 되시는 이가 거기 팽목항에서 그렇게 울고 계셨다.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는”(미 2:1) 자들은 지금도 건재했다. 팽목항에서 관사도, 진목도, 독거도, 상구자도로 흩어지는 팀원들은 슬픔이 가시지 않는 그 항구에서 각자 기도하며 어린 영혼들에게 하늘의 축복을 간구했다. 관사도 B팀 한우식(33·총신대 신학대학원)씨는 누군가 맹골수도를 향해 세워놓은 푯말 ‘함께 울겠습니다’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했다.
그렇게 애써 슬픔을 짓누르고 관사도에 닿았을 때 김 목사가 선교선 ‘등대 2호’를 내리며 우리를 맞았다. 4월 16일 참사 당일 오전 9시30분, 김 목사는 세월호에 접근하여 구조된 학생들을 인근 섬 서거차도로 실어날랐다. 김 목사는 필리핀 빈민촌 선교 2년6개월을 마치고 99년부터 이 섬에서 사역하고 있다.
“세월호 4층 창가에서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배 안이었으니 제겐 무성(無聲)이었죠. 아이들의 흰 이가 유난히 떠올라요.”
소름이 돋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어민 배는 커서 세월호에 접근하기 어려웠어요. 어민들이 유리를 깨라고 아우성쳤어요. 한데 수경들이 책임자가 현장에 도착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김 목사는 팀원들 앞에서 상처가 될까 그 얘길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언어는 무거웠고, 바다안개는 여전했다.
“지난주일 꿈에 흰 이가 가지런한 아이들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마귀가 그 아이들 뒤로 일어나는 겁니다.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어민 대개가 이런 꿈에 시달려요.”
팀원들도 김 목사에게 되도록 참사를 묻지 않았다. B팀 7명 중엔 김현희(총신대 유아교육과2)양 등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김 목사는 어린 그들에게 물 속 육신의 유망을 전할 수 없었다.
노동하고 복음을 전하다
팀장 김광종(46·전북 완주 성덕교회) 전도사는 첫날 마을을 둘러본 뒤 1주일간 일거리를 챙겼다. 톳 수거 작업과 톳 말리기가 주된 작업이었다. 왜냐면 6월엔 톳, 7월엔 돌미역, 12월의 쑥 수확이 섬주민의 주된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어민들은 물때에 맞춰 양식 톳과 자연산 톳 수거에 바빴다.
“교회 청년들이 고맙제이. 누가 우릴 이렇게 챙겨준다냐. 학상(학생)들이 와준 것만도 감사허구먼.”
몸뻬 작업복 차림의 소마댁(73) 할머니는 건져낸 톳을 뒤집으며 말했다. 할머니는 저 앞섬 소마도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관사도로 시집 왔다. 섬 아낙 삶이 그렇듯 자식은 유일한 ‘메시아’였다. 하나님을 먼저 꼽지 않는다고 탓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 섬엔 ‘자식들’이 없다.
“교회 교육관에 마을 어린이 3명이 놀이터 삼아 옵니다. 그중 두 아이는 형제죠. 한 부모 아이들이죠. 엄마는 같은데 각각의 성을 써요. 딱히 말하기 어려운 사정들이 저마다 있어요. ‘온전한 가족’이 소망인 경우가 많아요.”
섬은 농촌보다 큰 돈 벌 일거리가 많다. 하지만 그 ‘큰돈’은 약탈의 구조를 지녔다. 연 수억대를 버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소위 ‘섬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상구자도 팀은 그런 구조 속에 놓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났다.
박원희 목사 얘기다.
“사회적 통제가 섬 곳곳에 미칠 수 없으니 구조악이 섬을 지배하는 겁니다. 비단 도서지방 주민에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에요. 도서지방 기관도 중앙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으니 ‘큰돈’ 시스템에 휘말려가는 거죠. 세월호 참사 사건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죠. 그러니 누가 사회적 약자를 챙길 수 있겠어요. 섬 안 사람들은 아무도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할 수 없어요. 얽혀 있거든요. 단 한 곳, 섬 교회만이 소외된 이들의 말을 듣고 위로하고, 구령할 수 있죠. 섬 안에서 섬 주민 마음속에까지 들어가 함께 울어줄 이가 섬 교회 아니면 어디 있나요?”
김요셉 목사의 얘기다.
“낙도선교회, 분당중앙교회, 천안북일교회 등 섬 선교를 위해 기도해 주고 복음선 등대호 등을 띄워 주는 이들에게 감사하죠. 저는 예수님과 그들이 있어 버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 오신 팀원은 신학생과 대학부 학생,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대부분이에요. 큰 목사님들, 장로님들도 오셔서 땅 끝을 보셨으면 좋겠어요. ‘목사님 아름다운 섬에 살아 정말 좋으시겠어요’라고 반쯤 철없는 소리를 해도 예수 믿는 사람끼리 웃고 떠드는 게 좋기만 하죠.”
현희씨의 특산 미역무침 레시피
B팀 현희씨와 식사 당번이 셋째날 저녁 식탁에 특산 돌미역을 데쳐 내놨다. 서울서 싸온 볶음멸치 등 밑반찬이 전부인 식탁이 풍성해졌다. 식사 기도를 마치고 다들 미역무침에 반해 맛있게 먹었다. 뒤늦게 맛본 김 목사가 ‘아차’ 했는지 한마디 했다.
“미역을 데쳐 찬물에 식혀 무쳐야 하는데 그냥 무쳤군요. 말해준다는 것이 그만…. 찬물에 한번 씻어야 오도독 씹히는 참맛을 느낄 수 있는데….”
“아이고, 목사님 일찍 말씀해 주시죠. 그래도 별미네, 별미! 하나님 감사합니다! 현희씨 감사합니다!”
그들은 매일 좌충우돌하며 낮엔 노동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밤엔 기도했다.
팽목·관사도=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미션 르포] 땅 끝, 상실의 바다에서 희망을 거두다
입력 2014-07-05 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