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성돌에 그날의 아픔 새겼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남한산성

입력 2014-07-03 02:27 수정 2014-07-03 10:07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이 녹음 속에서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남한산성 4대문 중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서문에서는 서울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남문.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가슴 아픈 사건이 병자호란이다. 청나라 10만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인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간다. 그때가 1636년 12월이었다. 성문을 꼭꼭 걸어잠근 채 버티던 인조는 결국 이듬해 1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다. 377년 전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애타게 지켜본 남한산성이 최근 한국에서는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그날의 아픔을 위로받았다.

산성(山城)은 오랜 세월을 침묵으로 살아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비록 성곽은 비바람과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허물어지기도 했지만 성돌 하나하나에는 민족과 민초의 애환이 깊게 각인되어 있다. 수도권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도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산성이다.

47일 동안 생(生)과 사(死)가 뒤엉켜 싸웠던 남한산성은 위기 때마다 국방의 보루 역할을 한 역사의 현장이다. 산이 울창하고 계곡이 아름다워 사철 산행객들로 붐비는 남한산성의 역사는 백제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해발 5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11.7㎞(본성 9㎞, 외성 2.7㎞)에 이르는 성곽에 4대문을 비롯해 5개의 옹성, 16개의 암문 등이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200여개의 문화재를 보듬고 있다.

남한산성의 정문은 인조를 맞았던 남문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지화문(至和門)으로 불리는 남문은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곳으로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일제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다가 1976년 복원됐다. 남문 앞에 뿌리를 내린 네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350년을 넘은 보호수다. 이 중 한 그루는 고사목이 되었으나 한쪽 가지에는 잎이 돋아나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돌로 쌓은 성벽은 주변의 지형대로 등고선을 그린다. 남문 성곽에 올라 이끼 긴 성벽을 왼쪽에 끼고 등고선을 닮은 성곽길을 오르면 서울과 성남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춘정을 지나 수어장대(守禦將臺)로 가는 길이 나온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2층 누각으로 남한산성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장대다. 인조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로 부르다 영조 때 2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옆 보호각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보존되어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었다. 본래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었으나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1989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수어장대 옆의 청량당은 남한산성 축성 때 공사비 횡령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이회 장군과 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수어장대에서 우익문(右翼門)으로 불리는 서문까지는 피톤치드 그윽한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서문은 산세가 가팔라 청군이 쉽게 접근하기 곤란한 곳으로 송파 거여 마천 방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남한산성 칩거 47일째 되던 날에 서문을 나선 인조는 삼전도 앞 들판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의 예를 세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울긋불긋한 차림의 산행객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서문을 나서서 높다란 성벽 옆으로 난 좁은 오솔길을 100m쯤 오르면 남한산성 전망대가 나온다. 서울 남산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관악산과 청계산, 오른쪽으로 아차산과 도봉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삼전도 앞 들판은 아파트를 비롯한 고층빌딩들이 메우고 있다. 서울 송파구를 중심으로 강남 일대와 멀리 하남시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망대에서 다시 서문으로 들어와 성곽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남한산성의 옹성 중 가장 아름다운 연주봉옹성을 만난다. 제5암문을 빠져나와 연주봉옹성에 오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연주봉옹성은 동장대터와 벌봉으로 향하는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곡선과 직선을 그리는 성벽은 능선과 하늘의 경계를 따라 멀리 동장대터를 향하다 소나무 숲 속으로 사라진다.

연주봉옹성에서 암문으로 들어와 북장대터를 지나면 전승문(戰勝門)으로 불리는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유일한 전투의 현장이다. 영의정 김류가 지휘하는 정예병 300명은 북문을 열고 나가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병과 대적했으나 안타깝게도 전멸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정조 3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전승문으로 명명했다.

북문에서 동장대터를 거쳐 좌익문(左翼門)으로 불리는 동문까지 연결된 성곽길은 다소 지루하다. 동장대터 성밖으로는 한봉에서 벌봉까지 외성이 둘러싸고 그 너머로 중중첩첩 펼쳐지는 산들이 수묵화처럼 아련하다. 동장대터에서 장경사산지옹성과 장경사를 거쳐 동문까지는 내리막길로 비교적 발걸음이 가볍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돌로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만들어 우마차의 동행이 불가능하다.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가 동문 아래를 지나기 때문에 성곽은 여기서 잠시 끊긴다. 그러나 도로를 건너면 물이 흐르는 수문 위로 성곽이 연결돼 출발점인 남문으로 돌아올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장 큰 이유가 서양식 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총안과 옹성 등 다양한 군사방어 기술을 집대성한 유비무환 정신을 높게 평가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삼전도의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번 주말 자녀와 함께 남한산성을 찾아 수어장대 보호각 속에 있는 ‘무망루(無忘樓)’의 교훈을 되새겨보면 어떨까.

광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