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양장본 표지 한 가운데 빨간 십자가가 있다. 그래서 얼핏 성경에 관한 책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한데 자세히 보면 십자가 위에 누군가 꽁꽁 묶여 있다. 십자가로 보이는 이 기구의 명칭은 ‘칠성판’. 사람을 물과 전기로 고문할 때 사용한 고문 도구였다. 여기 묶인 이는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었다.
보리출판사에서 낸 ‘짐승의 시간’은 564쪽 방대한 분량에 ‘민주투사’ 김 전 의원의 삶을 만화책이라는 형식에 담았다. 만화가 박건웅씨가 2년간 작업한 역작. 작가는 6·25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노근리 이야기’, 제주 4·3 항쟁을 이야기한 ‘홍이 이야기’ 등 역사문제를 주로 다뤄왔다. 이번 만화에서는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부각시키기 위해 붓을 이용해 흑백의 단순한 형태로 투박하게 그렸다. 그 시대 민중미술의 주요 형식이었던 판화를 보는 듯하다.
이 책은 김 전 의원이 ‘남영동’에서 겪었던 참혹한 고문 과정을 담은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했다. 김 전 의원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민청련) 의장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연행됐다. 1985년 9월 4일부터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0여일간 물고문, 전기고문, 전기봉고문 등 10여 차례에 걸쳐 고문을 받았다. ‘짐승 같은 시간’이었다. 김 전 의원은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어요.”
이 책은 그가 남영동에서 나온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86년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 형을 확정 받는 것에서 끝난다.
작가는 김 전 의원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풀어내며 자신이 경험을 녹였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친구들과 개구리를 잡아 죽이던 장면을 참혹한 고문 장면과 오버랩 시켰다. 작가가 군 복무 시절 고위 간부에게 불려가 조사 받던 모습도 나온다.
작가는 “인권 유린에 대한 고발 등 거창한 문제제기를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은 순교자와 같은 삶을 산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식의 대학입시를 걱정하거나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극악하게 변해 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며 “잘못된 제도 아래서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애국이라 여겼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은 출간 전부터 해외에서 먼저 관심을 받았다. 지난 1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해외진출용 기획원고 개발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해외 시장에 이 만화의 샘플을 소개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출판사 7곳이 판권 계약을 의뢰했다. 전 세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고문’이라는 소재를 작가가 붓 그림으로 탁월하게 연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책과 길] ‘고문의 광기’ 남영동 20여일 흑백 붓그림의 묵직한 고발
입력 2014-07-04 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