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고(빌 2:6∼7), 사람들과 같은 인생을 시작한 것은 그들의 질고를 친히 겪으시고(사 53:3) 범죄한 사람을 대신하여 징계 받아 고치기 위해서였다(사 53:5). 그리고 또 사람에게 본을 보여(요 13:15)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께서 본을 보인 ‘순종’의 시작은 우선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열두 살 때에 성전의 랍비들과 문답을 할 정도로(눅 2:46) ‘말씀’의 핵심을 알고 있었으며, 집을 나선 서른 살쯤에는 율법서와 역사서, 선지서와 지혜서 등을 종횡으로 인용하고 설명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묻기 위해 늘 ‘기도’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어내는 방법은 ‘두드림’이었다. 요한의 세례를 받는 ‘두드림’으로 ‘내 사랑하는 아들’을 확인했고(마 3:17), 나다나엘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 사이의 문제에서도 광야의 ‘두드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마귀의 도전을 ‘말씀’으로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다.
그는 ‘가나’에서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두드림’에서 시작하여 말씀으로 생명을 구하는 일에 나섰다.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강 같이 말씀이 흘러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또 사마리아 길 수가의 우물에서 ‘두드림’을 통해 ‘이스라엘의 임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일하라는 지시를 얻어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말씀의 능력으로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던 예수께서는 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깜짝 놀라신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놀라신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말씀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0∼12) 여기서부터 다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생각한다. ‘이스라엘’은 내 ‘장자(출 4:22)’라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세운 나라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었다.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에 성을 쌓으소서.”(시 51:18)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영원히 예루살렘에 붙잡아 두려는 다윗의 소원을 그분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성전을 짓게 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 9:3)
그러나 그 약속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왕상 9:6∼7)
이스라엘이 그것을 지키지 못하자 선지자 이사야는 탄식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사 29:1∼2)
‘아리엘’이란 예루살렘의 별칭이고 번제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의 시선을 갈릴리 쪽으로 돌렸다.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 9:1)
그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에서 자라났고, 갈릴리 호반의 여러 마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그가 택한 열두 제자도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명절 때마다 ‘아버지의 뜻’을 ‘두드려’ 열어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요 5:1)
여기서는 무슨 절기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의 3대 절기는 아닌 것 같고, 유월절이 지난 후 얼마 안 되었을 시기이니 ‘부림절’쯤으로 추정된다. 바사 왕 아하수에로가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를 다스리던 BC473년에 총리 하만이 각 도의 유대인을 몰살하려고 계책을 꾸미자 이를 알게 된 유대인 왕비 에스더가 기도하며 금식하고 ‘제삼일’에 왕께 나아가 호소하여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다. 그 결과 오히려 하만이 처형당하고, 유대인들은 왕의 허락을 받아 하만의 일족과 그 무리를 도륙했다. 그리고 이 대역전의 날을 ‘부림절’이라 하여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특징은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127도의 모든 유대인과 관계된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요 5:2∼4, 한글개역판)
예수께서는 거기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간다고 변명했으나 그는 오래된 병자 노릇에 익숙해져서 편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병에 익숙해진 예루살렘은 이미 죽음의 도성이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병자는 곧 일어서서 자리를 들고 그곳을 떠났다. 이것으로 예수께서는 말로만 구원을 원하는 예루살렘,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한 예수를 오히려 율법 위반으로 걸어 박해하는 예루살렘에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확인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이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겠노라고 그는 죽음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선언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8)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입력 2014-07-04 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