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담는 그릇 사회적기업] “발가락 포인!” 호통에 노숙인들 땀 송글송글… 삶 부축하는 발레 연습실

입력 2014-07-02 02:47
경기도 과천시 과천시민회관 2층 서울발레시어터 연습실에서 1일 노숙인들이 발레 강습을 받고 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2011년부터 잡지 ‘빅이슈’를 판매하는 노숙인들에게 무료로 발레를 가르쳐왔다. 과천=서영희 기자

“임 선생님, 허리 더 펴세요. 발가락 포인!”

지난 29일 오후 4시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과천시민회관 2층에 있는 서울발레시어터 연습실. 발레리나 김영신(30)씨가 특별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50평 연습실에선 한쪽 벽의 대형거울을 마주한 채 40대 남성 5명이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우왓.” “어이쿠.” 스트레칭이 30분 가까이 계속되자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이 쏟아졌다. 다리를 90도로 벌린 채 양손은 깍지 끼고 상체를 숙이는 동작이 반복됐다. 발등과 발가락을 앞으로 구부려 동그랗게 하는 ‘포인’ 동작 때문에 발가락에 힘을 주느라 임훈(가명·48)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발레는 발끝을 포인하고 있어야 해요.” 김씨가 미소를 띠며 발레의 기본을 재차 강조했다.

발레 연습을 하고 있는 이들은 노숙인 자활을 돕기 위해 2010년 창간된 잡지 ‘빅이슈’를 파는 노숙인들이다. 문화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무료 발레 강습을 하고 있는 서울발레시어터는 2009년 예비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2010년 겨울 한 대기업이 주관한 재능기부 프로그램에서 ‘빅이슈’를 접한 제임스 전(55) 예술감독이 노숙인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기로 하면서 극적인 만남이 성사됐다.

사회적기업이라면 보통 취약계층 일자리와 공정무역 정도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전 감독은 예술이 갖는 치유 기능이 사회공헌의 영역을 넓히는 데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정신적 건강”이라며 “발레를 배우면서 자신의 몸을 알아가고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마음의 밥’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4년째 일요일마다 노숙인들에게 발레 강습을 하고 있다.

이런 순기능은 수강생들의 변화에서 입증된다. 김씨는 “노숙인들이 처음에는 단원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며 “발레를 꾸준히 배워 무대에 서고 난 후에는 적극적으로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발레동작 연습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무대공연을 한 성과이기도 하다. 서울발레시어터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12월 차이콥스키 음악을 토대로 한 창작발레 ‘호두까기 인형’ 공연 때 이들을 출연시켜왔다. ‘파티’ 장면에서 화려한 분장과 무대의상을 입고 파티에 초대된 손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인근에서 빅이슈를 파는 임씨도 지난해 12월 과천시민회관 공연무대에 섰을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무대에 서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관객들이 우리를 향해 박수칠 때 성공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 서귀포 출신으로 보육원에서 자란 그는 10대 때부터 노점을 전전했다. 경기도 부천에서 15년간 노점을 운영하며 생선·채소 장사를 했다.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회사가 부도나 거리로 내몰렸다. 2010년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인근의 사회복지단체 ‘다일공동체’에 들어갔고 거기서 ‘빅이슈’를 만났다. 이후 발레를 배우며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하루 6시간 이상 지하철역에 서서 잡지를 팔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직접 몸을 움직이며 삶의 활력을 찾았다.

발레슈즈를 신고 1시간 남짓 계속된 연습이 끝나자 처음 시작할 때의 어두웠던 표정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오늘은 어떤 동작을 배울까 늘 기대하게 돼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임씨가 환하게 웃었다.

과천=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