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생활고 비극 여전한데… 긴급복지예산 동났다

입력 2014-07-02 03:44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 건 32세이던 5년 전이었다. 아내 박은혜(가명·36)씨가 둘째를 임신하자 당시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사업에 뛰어들었다. 슈퍼마켓 납품업을 시작했고 그럭저럭 유지됐다. 경기도 파주의 20평대 아파트에서 부부와 두 아들이 단란하게 지냈다.

3년쯤 전부터 사업이 어려워졌다. 이명박정부의 두 번째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다. 백방으로 돈을 빌려 부도는 막았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됐다.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건강보험료 160만원을 내지 못했다. 가스·전기료도 수십만원 연체됐다. 여기저기서 빚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남편은 혼자 끙끙 앓았다. 박씨는 올 1월 셋째를 출산한 터였다. 3억원쯤인 빚을 못 갚아 급기야 아파트 압류 통지서가 배달됐다. 고민하던 남편은 5월 20일 집 뒷산에 올라갔다. 아홉 살, 네 살, 5개월짜리 세 아들과 전업주부 아내를 두고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2월 27일 세상을 등진 ‘송파 세 모녀’를 닮았다. 밀린 공과금을 봉투에 담아놓고 동반 자살한 세 모녀처럼 ‘파주 30대 가장’도 개인이 감당키 어려운 생활고에 짓눌렸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 현실까지 불과 석 달 만에 되풀이됐다.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는 다급한 저소득층에 생계비 등을 제공하는 ‘긴급복지지원’ 제도를 열심히 홍보했다. ‘위험할 땐 119, 힘겨울 땐 129’(보건복지부) ‘갑작스러운 생활고 전화(120) 한 통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서울시)라며 콜센터 번호를 알렸다. 이런 제도를 몰랐는지, 그 정도로는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파주 가장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남은 가족이다. 아파트는 경매에 넘어갔다. 박씨는 출산으로 몸도 정상이 아니다. 5월 26일 친척이 129에 전화를 걸어줬다. 복지부는 파주시에 알렸고 박씨에게 4인 가구 긴급복지 생계비 108만원과 초등학생 교육비 20만4700원이 지급됐다.

그러나 긴급복지는 한시적 지원 제도여서 박씨는 6개월 동안만 이 돈을 받을 수 있다. 이 가정의 상황은 우리나라 사회 안전망 수준을 보여준다. 남편은 기댈 곳을 찾지 못해 자살을 택했고 아내와 세 아이는 잠시 안전망에 머물다 곧 튕겨나간다.

그래도 긴급지원을 받은 건 운이 좋은 편이다. 129에 걸려온 생활고 상담 전화는 2월 2757건에서 세 모녀 사건 뒤인 3월 1만263건으로 급증했다. 이 중 자격 요건을 통과해 지원받은 경우는 2298건뿐이다. 4, 5월도 사정은 비슷하다. ‘제2의 세 모녀’ 위기 이웃은 우리 주변에 이렇게 많았다. 정부는 그중 20% 정도에만 6개월짜리 안전망을 제공한다.

2010∼2012년 긴급복지 예산은 연간 579억∼589억원이었다. 정부는 이 돈을 다 쓰지 못했다. 예산은 있는데 사람들이 제도를 잘 몰라 2010년 74억원, 2011년 32억원, 2012년 242억원이 남았다. 지난해에는 경기 침체를 감안해 추경예산까지 971억원을 확보했지만 또 435억원이 남았다.

매년 돈이 남자 올해는 긴급복지 예산을 100억원쯤 깎아 499억원만 편성했다. 그러다 세 모녀 사건이 터져 부랴부랴 이 제도를 알렸더니 그동안 우리가 몰랐거나 모른 척했던 위기 이웃의 요청이 쇄도해 5월까지 419억원을 써버렸다. 남은 예산은 몇 십억원이 안 된다.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허선 교수는 “세 모녀나 박씨의 경우는 일시적 긴급복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빈곤은 마르지 않는 샘이다. 항시적 지원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태원준 문수정 박세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