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했다.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1991년 아프리카에서 서울로 돌아오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무턱대고 아무 일이나 벌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를 찾아갔다.
“새로운 사업도 좋지만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해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조 사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곽선희 목사님의 말씀대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기도했다. 며칠 후 일본중포신문사(일본의 천막전문신문사)의 수토 사장한테 연락이 왔다. 그와는 67년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역시 천막이었다. 이 일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용천막은 이미 여러 회사들이 일하고 있었고 그들과 경쟁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토 사장은 나에게 현대 건축기술이 접목된 첨단 천막을 새로운 사업아이템으로 만들라고 권했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보았던 미국의 조지아돔, 일본의 도쿄돔 등의 대형 천막건물들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까지 한국에 없던 천막을 만들자! 미싱으로 봉재를 해서 만들던 천막이 아닌 새로운 시설과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천막….”
당시 국내에는 새로운 천막을 생산하는 시설이 없었다. 건축용어로는 ‘막구조물’ 이라고 불렀다. 천과 천을 붙이는 기계, 천을 자동으로 자르는 컴퓨터 재단기, 천막을 설계하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필요했다. 설계기술을 가지고 있는 외국설계엔지니어도 소개 받았고, 공장 제작기술도 도입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9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엑스포가 대전에서 열리게 됐고, 전시장으로 이런 첨단천막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건설사, 감독, 설계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막구조물은 국내기술로 가능하지 않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시설과 기술이 있으니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주요 전시장용 막구조물은 모두 외국인들에게 넘어갔다. 타이가에게 주어진 일은 은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작은 그늘막이 전부였다. 요즘에는 동네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그늘막이다. 이것도 우리의 기술을 믿지 못하는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겨우 따낸 터였다.
지금 타이가는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기술에 대한 의심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회사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아무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술개발과 홍보, 재료 개발 등 여러 일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진국에서는 오랜 세월이 걸려 개발한 기술들인데 우리는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첨단 천막에 대한 기술들을 확보하게 됐다. 마침내 96년에는 서울 여의도에 중소기업전시장을 우리 기술로 짓게 됐다. 국내 최초의 공기 막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70m, 110m에 달하는 초대형 천막이었다.
2000년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수주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때까지도 스타디움 지붕으로 쓰이는 천막공사는 모두가 일본, 미국, 독일 등의 외국회사의 차지였다. 그러나 지붕이 절반 정도 올라갈 때까지도 서울시는 우리의 기술을 믿어주지 않았고, 건설사에는 승인이 나지 않는 공사를 하고 있는 꼴이 되어 결국 서울시로부터 공사중단 지시가 떨어졌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런 국가적인 중요한 프로젝트를 실적도 없는 업체에 맡긴 것은 잘못이다”라는 것이 서울시 담당자의 입장이었다.
낙심에 젖어 있을 때 서울시에서 우리도 모르게 외국의 유명한 막구조전문가를 초빙해 현장에서 조사를 시켰다. 며칠동안 지붕 구석구석을 샅샅이 조사한 이 전문가는 공식회의 석상에서 설계, 제작, 설치가 모두 뛰어난 A급 막구조라고 평가했다. 모든 것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서울시 담당자는 처음으로 웃음을 머금고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동순 (8) “한국도 할 수 있다” 초대형 천막지붕 사업 도전
입력 2014-07-02 0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