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는 친구 ‘7총사’와 재미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균 신장이 180㎝에 가까웠던 친구 7명은 모두 운동과 팝송을 좋아했다. 기타와 타악기를 잘 다루었던 친구들은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내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다.
경기도 구리 동구릉에서 벌어졌던 소풍콘서트에선 우리들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늘 즐거우랴! 나를 비롯한 친구들이 공부보다는 관계를 중요시하는 데에 치중했기에 시험을 잘 치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급기야 성적표가 나왔고 성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중간고사까지 비교적 괜찮았던 성적은 급전직하했고 형편없는 성적표를 부모님께 가져가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에 직면했다.
아버님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앉아 계셨다. “이게 성적표냐?” “예.” 나는 속으로 ‘죽었다’를 복창하며 무릎을 꿇고 결연한 자세로 아버지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혹 너무 심하게 야단을 치면 그냥 가출이라도 해 버릴 심산이었다. 성적표에 나타난 나의 성적은 전 과목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 “이놈아, 이걸 성적표라고 가져왔느냐. 네가 이래도 사람이냐!”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달리 말씀하셨다. “도일아, 너 그래도 영어 성적 하나는 괜찮구나. 아주 잘했다. 조금 더 열심히 해 봐라.” 그러시면서 도장을 꾹 찍어 주시는 게 아닌가. 사실 언어와 인문과목에는 조금 소질이 있었던 터라 공부를 많이 안 해도 평균 정도는 되는 터였다. 나는 크게 안도하며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고서 의기양양하게 안방을 빠져나왔다.
만일 그때 아버지가 험한 말씀을 하시고 종아리를 때리셨다면 나는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책망 대신 칭찬을 하셨다. 형편없는 성적의 과목보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았던 영어성적을 끄집어내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살려주셨다.
훗날 교육학을 전공하고 이런저런 이론과 실제를 접하다 보니 아버지는 학습자를 살리는 것에 중점을 두신 것이다. 분석적이고 정확한 판단으로 콕 집어주는 예리한 책망보다 어두움 속에서 단 한줄기라도 가능성의 빛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칭찬 한마디가 학습자를 살린다.
한국 선교사의 선두주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는 선교활동 중 수많은 어려움을 만났다. 일이 안 풀릴 때도 있었고 동료 선교사들과 불화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선교본부에서 지원금이 오지 않을 때는 그의 형이 타자기를 판 돈으로 선교를 지원하는 적도 비일비재했다. 평양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선교의 축에서 멀어져 있던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만두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그때마다 그를 붙잡아 주는 것은 가훈이었다. “불가능을 일소(一笑)에 부치고 무엇이든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라!(Laugh at impossibilities and say it shall be done!)” 그의 부모는 늘 이런 칭찬과 격려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얘야 다시 해보렴. 넌 할 수 있어. 참 잘했구나.” 다 집어치우고 싶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 삶을 힘 있게 살아낼 수 있는 비결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앞에서 한바탕 웃어버리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칭찬에 있다. 부모여, 책망의 깃발은 내려놓고 칭찬의 깃발을 들어라.
김도일 교수(장신대 기독교교육과)
[시온의 소리-김도일] 부모여, 칭찬의 깃발을 들어라
입력 2014-07-02 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