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카톡이 ‘까똑’ 하고 울었다. 나는 깜짝 놀라 글을 쓰다 말고 스마트폰을 잡아당겨 카톡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낀 한 여인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활짝 웃고 있다.
“여기는 파리예요. 문득 선생님이 생각나 사진을 보냅니다. 그때 강의가 끝나고 나서 역까지 배웅했던 봠봠봠예요.”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아아, 그 여자는 눈이 아주 아름다웠었지, 그 먼 곳에서 사진을 보내오다니…. 나는 감동했다. 얼른 답장을 썼다. ‘참 멋지네요. 사진 참 잘 찍었군요!’ 그런데, 그 답장 뒤로 한 목소리가 멈칫멈칫 걸어온다.
“요즘은 4000만이 사진작가예요!” 하던 어떤 사진작가의 툴툴대는 볼멘소리. “그러니까 좋잖아요. 모두들 그렇게 아름다운 생의 순간들을 잡아내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필름 시절 사진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단 말입니다, 두께 같은 것….”
“글쎄요. 그보다 오늘 우리는 ‘삭제’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는 않을까요?”
그 전엔 이별한 애인의 사진을 아궁이 앞에서 전부 태워버리곤 하는 일이 흔했다. 그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옛 애인은 시간이 되어 떠나가며 아름다워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의 스마트폰 사진은 아궁이까지 가지 않는다.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흐느끼며 태우던, 불길이 옛 애인을 삼키는 걸 지켜보면서 흐느끼던 장면과는 비교도 안 되게 ‘삭제’는 빠르게 일어난다. 어느 시대보다 빠른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장점인 오늘의 스마트폰 사진과 인화 한번 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했던 인화지 위의 사진의 차이점. 어느 것이 보다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것일까. 그때 책상 한구석에 세워 둔 사진틀 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정한 한때를 보여주는 빛바랜 사진 한 장. ‘우릴 결코 지우지 말아라. 아버지와 나는 지금 나란히 서 있구나. 바람 같았던, 바람같이 어느새 사라지시곤 했던 너희 아버지와.’
사진의 공간이 나에게 달려온다. 그 공간은 운동한다. 그렇다. 사진이란 단지 과거 어느 시점의 추억이 그려져 있는 평면의 캔버스가 아니다. 거기엔 묘한 입체성이 있다. 그 입체성은 기억을 추억이란 존재로 만든다. 시간이 그 위에 무늬를 그리며 흘러가는 것이다. 아, 사진이란 추억의 마차. 아무도 쉽사리 삭제되지 않는 그런 사진을 이 ‘삭제의 시대’에 보고 싶다.
강은교(시인)
[살며 사랑하며-강은교] 삭제의 시대
입력 2014-07-02 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