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동순 (7) “아프리카 54개국을 코리아 제품으로 도배하자!”

입력 2014-07-01 03:39
1982년 부인 박옥연 권사와 타이가 컬러현상소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조동순 회장.

1980년대 초 나이지리아는 네온사인이 드물었다. 당시 밤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거리의 풍경을 연출한 ‘타이가 컬러현상소’는 명물이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 중 하나가 사진 현상소이다. 사진현상소 중 70%는 한국인들이 운영하고 있다. 아마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내 이름 석자는 몰라도 ‘타이가’라는 브랜드는 기억할 것이다.

타이가의 명성은 당시 아프리카 순방 중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오찬 회동 때 찍은 사진이 그날 만찬장에 앨범으로 만들어져 전달됐기 때문이다. 전 전대통령은 이후 아프리카에 진출한 사진현상소의 활약상을 곳곳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에서의 사업은 1983년 군부 쿠데타로 세후 샤가리 정부가 붕괴되면서 분수령을 맞았다. 나는 인근 코트디부아르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수도 아비장에 컬러 현상소를 차렸다. 이후 85년 세네갈, 86년 카메룬 두알라, 88년 콩코(자이레)에도 현상소 법인을 만들었다. 또 다른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아프리카 54개국을 메이드인 코리아 제품으로 도배하자.”

다음 목표는 아프리카에서 ‘백화점왕’이 되는 것이었다. 안팎의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MBC문화방송이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지구촌 한국인’에 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졸지에 유명인사가 됐다. 수출입은행에서 필요한 자금을 다 줄 테니 무슨 사업이라도 시작만하라고 할 정도로 회사의 신용이 좋았다. 과욕이 문제였다. 사진 현상소 장소를 물색하다가 이전에 영화관을 하던 건물이 탐이 났다. 사업 자금상태도 확인하지 않고 덥석 계약부터 했다.

은행에서 아프리카 어디든지 깃발만 꽂으면 돈을 다 대주겠다는 말만 믿은 게 잘못이었다. 사업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결국 48시간 내에 수십 만 달러를 서울로 송금하지 않으면 모든 사업이 다 부도가 날 위기에 처했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생각지 못한 도움의 손길이 날아들었다. 카메룬 현지 은행에서 30만 달러가 입금됐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간신히 부도 위기를 넘긴 이튿날 그 은행 관계자가 다시 나타나 “시티은행에서 잘못 입금된 돈”이라며 당장 다시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서울로 송금을 했기 때문에 갚을 수 없다”고 버티자 은행 관계자는 연 13% 이자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분할 상환할 것을 제안했다.

마침내 87년 12월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서 이 나라 최대 규모 백화점 ‘타이가 아케이드’를 세웠다. 건물을 임대해 2층짜리 백화점으로 개조했다. 500평(1652.8㎡)의 매장을 마련하고 직물, 도자기, 화장품, 조명기구, 완구, 목재가구, 액세서리 등 국산제품을 다 팔았다. ‘아프리카에 국산품을 취급하는 백화점을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88서울올림픽 때는 카메룬 선수단을 김포 공항에서부터 안내하고 선수복과 신발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이에 카메룬 정부는 감사의 선물로 어업라이센스를 주고 카메룬 명예영사로 위촉해주었다.

하지만 과욕이 부른 부와 명성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값싼 중국 상품이 재래시장에 밀려들면서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콩고 내전이 격화되는 등 주변국 환경이 날로 악화돼 백화점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백화점 경영난으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아내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애초부터 백화점 사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처음으로 돌아가세요. 서울로 돌아가면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겠어요.”

아내의 충고대로 즉시 백화점을 정리했다. 사진 현상소도 현지인들에게 넘겨주고 미련 없이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