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진영] 레드카드 총리

입력 2014-07-01 02:18
축구 경기에서 레드카드는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도 여실히 입증됐다. 본선 조별 예선에서 선수가 레드카드를 받은 대표팀은 모두 10개국. 이 중 16강에 오른 나라는 벨기에, 우루과이, 그리스 3개국에 불과하다. 그나마 오는 2일 새벽 미국과의 시합을 앞둔 벨기에를 제외한 2개국은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축구 전문가들은 동료 선수가 레드카드를 받으면 팀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이는 대체로 패인으로 이어진다고 진단한다.

레드카드에 관한 한 우리 국가대표팀도 쓰라린 기억이 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 전반 28분, ‘왼발의 달인’ 하석주가 프리킥한 공이 수비수 몸을 맞고 그대로 골로 연결됐다. 월드컵 사상 최초의 전반 선제골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불과 2분여 만에 하석주는 백태클 반칙으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옐로·레드카드를 착안한 사람은 영국인 축구심판 켄 애스턴이다. 66년 잉글랜드월드컵 심판위원장이었던 그는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4강전에서 경고와 퇴장에 대한 심판 판정이 모호하다는 언론의 지적이 잇따르자 좀 더 명확하게 벌칙을 주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운전 중에 신호등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애스턴은 ‘노란색은 경고, 빨간색은 퇴장’을 의미하는 카드를 떠올렸다. 국적이 다양한 선수들의 언어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규칙은 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첫선을 보였다. 축구에서 시작된 레드카드는 럭비, 미식축구, 필드하키, 핸드볼, 배구 등 다른 구기 종목은 물론 펜싱, 경보, 수상 폴로 등 여러 스포츠에서 활용되고 있다.

레드카드가 우리 정치판에도 등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공동대표는 지난 27일 정홍원 총리의 유임에 대해 “아무리 급해도 레드카드를 받은 선수를 재기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29일에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축구경기에서 레드카드 받은 선수는 즉시 떠나야 한다. 아무리 급해도 레드카드를 받은 선수를 재기용할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 총리는 유임 직후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을 만나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본인이 레드카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심판도 아닌 김 공동대표가 판정한 레드카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정치판은 축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이래저래 정 총리의 스타일은 구겨지고 있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