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나무가 질문한다… 이건용 회고전 ‘달팽이 걸음’

입력 2014-07-01 02:20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이건용 작가가 1973년 제작한 설치작품 ‘신체항’. 3m 높이의 오동나무 한 그루를 뿌리째 전시장에 옮겨놓아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오동나무 한 그루가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뿌리는 두꺼운 지층에 묻혀 있는 모습 그대로이고, 가지는 잘린 채 둥치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높이 3m가 넘는 이 작품은 1973년 프랑스 파리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제8회 파리국제비엔날레에 출품해 주목 받은 이건용(72) 작가의 설치작품 ‘신체항’이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온 작가는 1960년대 “그림은 왜 화면을 마주보면서 붓으로 그려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1969년 ‘공간과 시간(ST)’을 결성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던 ‘아방가르드’를 실천하는 모임이었다. 아방가르드는 기존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혁신적인 예술경향을 추구하는 전위예술을 뜻한다.

한국 전위미술 1세대 작가인 그의 40년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 ‘달팽이 걸음’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12월 14일까지 열린다.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회화와 조각, 드로잉, 설치, 영상 등 80여점을 선보인다. 작가는 질문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림은 평면 위에 그려진 환영이며, 조각이란 자연물에 가한 손길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지난 주말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요즘은 너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작품이 많고 기계로 복제한 느낌이 드는 것도 많다”며 “풍부한 환경적 소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감상자가 몸으로 부닥치면서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아날로그적이고 자연친화적이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생경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

튼튼한 나무 본체에서 뻗어 나올 법한 얇은 나뭇가지가 오히려 둥치를 떠받치고 있는 작품도 독특하다. 작가는 “원래 있었던 자연의 형태를 존중한 것”이라며 “자연과 의논해 작가의 개입 정도를 조정했다”고 소개했다. 캔버스처럼 네모난 나무틀에서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는 나무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같은 의미를 담았다.

전시장 천장 높이까지 얇은 나무 막대를 설치한 후 그 위에 작가 자신의 신발을 올려놨다. 가장 위에 있으면서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공간과 가장 아래에서 신체를 받치면서도 비슷한 처지에 놓인 신발을 비교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통치자가 권력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야 하는데 자기가 누리는 권력 자체에만 관심이 많다”고 작업의 배경을 설명했다.

‘신체드로잉’ 연작은 두 손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를 등진 채 팔을 뒤로 뻗어 선을 긋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작업 도중 화면은 아예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하트모양 등 형태가 그려진다. 작가는 “그림은 평면과 신체가 만나는 접점에서 그려지는 것”이라며 “의식이 과잉되고 조작적인 방법이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이탈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퍼포먼스 작품 ‘달팽이 걸음’도 선보인다. 자연 속 달팽이의 느린 걸음을 통해 디지털시대 문명의 빠른 속도를 가로질러 보자는 것이다. 미술계 주류의 흐름과 관계없이 평생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온 그의 작품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작품 앞에서 열정적으로 퍼포먼스를 해보이던 그는 “너무 빠르게 살지 말자. 좀 천천히…”라며 웃었다(02-2188-6000).

글·사진=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