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서울 강서구의 수천억원대 재력가 송모(67)씨 살인사건은 현역 서울시의원이 채무 탕감을 위해 10년지기 친구를 동원해 벌인 잔혹한 살인극이었다. 시의원은 친구에게 “네 가족은 내가 책임질 테니 살해 후 중국으로 가라. 만약 잡히면 자살하라”며 흉기까지 구해다 범행을 사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친구는 시의원의 부탁을 받고 50여 차례나 범행 장소를 답사한 뒤 송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송씨를 살해한 팽모(44)씨와 이를 사주한 김모(44) 서울시의원을 각각 살인과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했다고 29일 밝혔다.
◇10년 친구의 은밀한 부탁=10여년 전 형을 통해 알게 된 김씨는 팽씨에게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중국을 오가며 가방사업을 했지만 벌이가 시원찮던 그에게 김씨는 ‘잘나가는 친구’였다. 김씨는 대학 졸업 후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내며 정치에 입문한 뒤 2010년 서울시의원에 당선돼 승승장구했다. 팽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김씨를 자주 자랑했다고 한다.
김씨는 팽씨에게 경제적 도움을 줘 왔다. 11년 전부터 팽씨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조금씩 돈을 빌려주곤 했다. 2008년 부도가 나면서 팽씨가 김씨에게 빚진 돈은 7000만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김씨는 빚 독촉을 하지 않았고 팽씨는 그런 그에게 더 큰 믿음을 갖게 됐다.
그런 ‘친구’ 김씨가 2012년 팽씨에게 부탁을 하나 해 왔다. 김씨는 2010∼2011년 재력가 송씨에게 5억원을 빌렸고 그 빚 독촉을 받고 있었다. 송씨가 갖고 있는 5억원 차용증을 훔친 뒤 송씨를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살해 후 무사히 중국으로 도망가면 그동안의 빚 7000만원을 탕감해주고 아내와 자식들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경찰에 잡힐 경우엔 “김씨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송씨를 살해한 것”이라고 진술할 것을 주문했다.
친구의 부탁에 팽씨는 1년4개월간 송씨 주변을 맴돌며 50여 차례 범행을 모의했다. 선뜻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고 그때마다 김씨의 채근이 이어졌다. 지난 2월 27일 팽씨는 결국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송씨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1차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김씨의 독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6·4지방선거가 가까워오자 송씨가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김씨를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1차 실패 나흘 만에 팽씨는 다시 한번 범행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CCTV 없는 곳으로…치밀한 범행=지난 3월 3일 자정쯤 김씨가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엔 안 된다”며 팽씨에게 전화를 해왔다. 결국 팽씨는 0시40분쯤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의 송씨 사무실에서 둔기로 송씨를 내리쳤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했던 송씨는 팽씨의 둔기를 빼앗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팽씨는 전기충격기를 꺼내 송씨를 쓰러뜨린 뒤 둔기로 여러 차례 때려 살해했다.
범행은 주도면밀하게 이뤄졌다. 인천에 살던 팽씨는 송씨 사무실로 가면서 택시를 두 번 갈아탔다. 송씨 건물로 진입할 때도 건너편 차도로 건너간 뒤 건물 인근에서 무단횡단을 해 들어섰다. CCTV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팽씨는 “오랜 기간 그 동네에서 살아온 김씨가 CCTV 없는 장소와 송씨의 동선을 미리 파악해 범행 동선을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팽씨는 범행에 사용한 도구도 김씨가 제공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김씨가 직접 전기충격기와 흉기를 구해줬으며 필요한 범행도구가 있으면 구입하라고 1400만원을 건넸다고 했다. 반면 김씨는 “신변보호용으로 사서 차에 뒀는데 어느 날 없어졌다”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팽씨는 범행을 마치고 용의주도하게 도주했다. 내발산동에서 인천 옥련동으로 60㎞를 가면서 택시를 네 번이나 갈아탔다. 옷에 혈흔 등이 묻어 있었지만 심야인 데다 온통 검은색 옷을 입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팽씨는 옥련동의 단골 사우나에서 범행에 입었던 옷을 갈아입었다.
이후 편의점에 들러 밴드 등을 사서 상처를 치료한 뒤 옥련동 청량산으로 향했다. 범행 때 입은 옷과 전기충격기 등을 없앴다. 그러곤 김씨와 수시로 통화하며 도주 계획을 세운 뒤 3일 후 중국으로 떠났다. 김씨는 팽씨와 통화할 때 자신의 휴대전화는 사용하지 않았다.
◇살인 교사 후 태연히 당선…“잡히면 자살하라”=경찰은 팽씨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워낙 치밀한 수법 탓에 그를 붙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경찰은 현장을 빠져나간 범인의 모습이 CCTV에 잡히지 않아 일대 택시회사 기사들을 상대로 일일이 탐문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서울 영등포동과 경기 부천 송내동, 인천 청학동의 택시 추적에 성공했고 팽씨가 옷을 갈아입었던 사우나에서 범인을 특정할 수 있었다. 팽씨의 10년 단골 사우나여서 이곳 사람들이 팽씨 모습을 알아봤던 것이 단서가 됐다.
중국 선양(瀋陽)까지 간 팽씨는 도피에 성공한 듯했지만 경찰의 인터폴 적색수배로 지난달 22일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국내로 송환돼 범행을 자백했다. 경찰에서 “배신감 때문에 자백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는 팽씨가 중국으로 도피한 뒤에도 ‘만약 공안에 잡히면 자살하라. 가족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며 “너무 그러니까 친구에 대한 배신감이 커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공안에 체포된 뒤 운동화 끈으로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또 키 177㎝에 90㎏이던 건장한 체격이 3개월여 도피 생활로 몰라보게 홀쭉해졌다고 한다.
김씨는 범행 직후에도 태연히 선거유세를 했다. 재선에 성공했지만 범행 연루 사실이 드러나면서 지난 25일 탈당했다. 구속된 김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그는 경찰에서 “송씨와 술을 먹다 ‘차용증이 필요하다. 하나 만들자’고 해서 만들어줬을 뿐 실제 돈을 받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범행 후 팽씨에게 사례금조로 지급한 돈에 대해서도 “팽씨가 내 돈을 갚으려면 자본금이 필요하대서 더 빌려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
[사건 인사이드] 현직 시의원, 60대 재력가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 왜?
입력 2014-06-30 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