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서 기독교 유치원 운영 김은실 선교사… 무슬림 아이들에게 성경도 가르쳐요

입력 2014-06-30 02:40
김은실 선교사가 잠시 귀국했던 지난 9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우간다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우간다 음발레 레인보우유치원의 교회에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모습.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 병사들이 쫓아오고 있었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됐을까."

김은실(47·여) 선교사가 말을 멈추자 폴(5)이 "빨리 얘기해주세요. 어떻게 됐는데요"라며 보챈다. "다음 이야기는 내일 해 줄게." 아쉬운 듯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매일 아침 9시, 우간다 음발레(Mbale)시 레인보우 유치원의 아침예배마다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음발레는 우간다 동북부에 위치한 제3의 도시로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다. 우간다에서 두 번째로 이슬람대학이 들어섰고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반기독교 테러가 벌어지기도 한다. 김 선교사는 이곳에서 2010년부터 3∼6세 아동을 대상으로 기독교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일을 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김 선교사는 29일 국민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이같이 고백했다. 2003년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김 선교사는 그해 9월 고(故) 신현균 목사의 케냐 부흥성회에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아프리카 땅을 처음 밟았다. “선교사가 되겠다며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선교지를 정하지 못해 방황했어요. 하지만 성회에서 아프리카 선교를 하라는 강한 응답을 받았죠.”

김 선교사는 2004년 부산의 한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지인의 소개로 우간다 호이마에서 사역하는 오영희(가명) 선교사를 찾아가 주일학교 사역을 도왔다. 그의 권유로 캄팔라시의 리폼드 신학교에서 유아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어린이 선교에 대한 꿈을 구체화했다. 모든 것이 형통한 듯했지만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독립사역을 시작하려던 2006년 후원 교회의 사정이 어려워져 재정지원이 끊겼다. 아프리카 선교를 반대한 가족과의 갈등도 심해졌다. 선교는커녕 당장 머무를 곳이 없었다. 우간다 각지를 돌며 현지인의 집에 며칠씩 기거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은 4년 가까이 이어졌다. 고비도 많았다. 2009년에는 콩고 국경 근처의 포트포탈에서 풍토병에 걸려 온몸이 마비됐다.

“돌아보니 하나님이 제게 주신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현지 문화와 언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2009년 8월 김 선교사는 음발레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레인보우 유치원 원장 자리를 소개받았다. 유치원을 세운 한국인 선교사가 2008년 아프리카 선교단체의 디렉터로 발령받아 원장 자리가 공석이었던 것.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고 학비로 운영돼 큰 어려움이 없다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교재와 시설 등이 낡았고, 예산은 바닥나 있었다. 원장 자리가 비자 유치원을 장악한 현지인 교사들이 학비를 빼돌려 배를 채웠던 것이다.

김 선교사는 일일이 학부모를 만나 개혁의지를 밝혔다. 시설을 보수하고, 역량 있는 현지인 교사 6명을 채용해 영어 과학 음악 미술 컴퓨터 등을 가르치며 교육의 질을 높였다. 학부모들의 만족도는 높아졌고, 대부분 이슬람교도인 그들은 심지어 자녀들에게 기독교 성경교육을 시켜도 된다는 데 동의했다.

2010년 50명도 되지 않았던 원생들이 지난해에는 100여명으로 늘었다. 현재는 85명의 어린이가 공부하고 있다. 2011년부터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무료급식도 시작했다. 소문을 듣고, 동참하겠다는 손길이 늘어나 현재는 주일마다 100여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 김 선교사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다. 임대한 유치원 건물과 땅을 주인이 매각하겠다고 한 것이다. “늘 그랬듯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겁니다. 어린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이 터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김 선교사는 담담한 어조로 부탁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