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밍밍한 한국 외교

입력 2014-06-30 02:24

외교부에 ‘대변인 정례브리핑’이라는 게 있다. 일주일에 두 차례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실시한다. 중요한 국내외 외교 현안에 대해 정부 입장을 밝히는 자리다. 하지만 우리 외교부의 브리핑은 ‘들을 만한’ 얘기가 별로 없다. 그래서 외신기자라곤 일본 기자 한두 명 오거나 말거나 할 정도다. 외교부 출입기자들도 절반 정도가 불참한다. 전반적으로 브리핑 내용이 시의성이 떨어지고 입장 개진도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건질 만한 게’ 없어서 외면 받는 것이다.

그 싱겁기가 중요한 사안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이면 더욱 문제다. 외교부는 지난 20일 일본이 고노(河野) 담화 검증 결과를 발표했을 때 몇 시간 지나 ‘대변인 성명’을 내놓았다. 당일 일본은 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검증 결과를 내놓았다. 그런데 정부가 내놓은 대변인 성명의 핵심은 “일본이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면서 이를 검증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행위임을 누차 강조해 왔다. 그런데도 검증을 강행한 데 대해 우리 정부는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였다. 하지만 ‘깊은 유감’이란 표현이 역사적 진실이 중대하게 훼손된 것에 대한 엄중함을 제대로 담아냈느냐는 비판이 적지 않다.

지난 23일 조태용 외교부 1차관이 외교부 청사로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 차관은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은 세계가 인정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를 흠집 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신뢰성과 국제적 평판만 상처 입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TV 카메라 촬영을 위한 ‘대외용 발언’ 기회였음에도 밍밍한 언급에 그쳤다. 아울러 두 손을 무릎에 얌전히 갖다 댄 부동자세의 조 차관과 턱을 바짝 쳐든 벳쇼 대사를 보면, 오히려 벳쇼 대사가 더 화가 난 것 같다는 평가가 많았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25일 기자간담회 때도 비슷했다. 윤 장관은 “고노 담화 검증 결과가 한·일 당국 간 타협의 산물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 자체가 본질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보고서에 아무리 정치하고 교묘하게 표현됐다고 해도 문제의 본질은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고노 담화 발표 이후 주무장관으로서 일본을 비판할 수 있는 첫 기회였지만 인상적인 단어 한마디가 없었다.

우리 장차관의 언급에서 엄중함이나 결기 같은 게 부족하다는 점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알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방한 때 한·미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끔찍하고 지독한 인권침해이며 전쟁 상황임을 감안해도 쇼킹하다”고 비판했다. 영어로는 ‘terrible(끔찍한), egregious(지독한), shocking(쇼킹한)’이라고 표현됐다. 셋 중 한 단어만 써도 ‘쇼킹한 비판’으로 평가됐을 것인데, 세 단어를 한꺼번에 동원한 거의 ‘응징’ 수준의 비판이었다. 그것도 전 세계가 지켜보는 생방송 회견에서 말이다.

외교부의 장관이나 차관, 대변인은 정치인이 돼야 한다. 실제로 그들은 국제 정치인들이다. 국제 정치인들은 주요 현안과 관련해서는 자기 수첩에 언제 어떤 자리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정곡을 찌르는 표현’ 몇 개씩은 갖고 있어야 한다. 단어 하나로 상황을 규정하고, 준엄하게 잘못을 지적하며,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그런 표현들 말이다. 인상적인 표현이 기사가 되고 제목이 되며, 그게 여론을 형성하고 결국 글로벌 시각이 되는 시대다. 우리 외교 당국자들이 케케묵은 조심스러움과 단조로움에서 이젠 좀 빠져 나오길 바란다. 그게 글로벌 추세다.

손병호 외교안보국제부 차장 bhson@kmib.co.kr